여름의 끝. ** 2학년 7반. 검고 굵은 글씨로 입혀진 팻말을 미간을 찡그린 채 노려보던 윤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문을 열었다. 드르륵. 문을 열자 조금은 소란스럽던 교실이 한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그리고 낯선 사람에 대한 가벼운 경계심과 호기심에 찬 조용한 웅성거림이 이어졌다. 윤세는 천천히 교단위로 올라가 교탁 위에 출석부와 학급일지를 내려놓았다. "출석을 부르겠다." 웅성거림이 좀 더 심해졌다. 윤세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름을 불러 내렸다. "강홍석, 김영석, 김진현, ...................................박정완, ..........................신영태, ...............이정훈, ........................정완...." 빠른 속도로 부르는 윤세의 목소리에 맞추어 아이들도 짧은 스타카토의 발음으로 재빠르게 대답을 했다. 그것이 한 이름에서 멈췄다. "정완? .........정완 안 왔나?" 정완이라는 이름을 건너뛰고 출석을 마저 불렀다. 대답하지 않은 이름은 정완뿐이었다. 윤세는 손끝으로 교탁을 가볍게 두드렸다. 수려한 아미가 살짝 찌푸려졌다. 형광등에 반사되어 번쩍이는 은태 안경이 그를 더더욱 차갑게 만들고, 색이 짙게 들어간 안경알 덕분에 보이지 않는 눈이 아이들을 경직시켰다. "나는..." 드르륵. 윤세가 오지 않는 학생을 포기하고 입을 열었을 때 굳게 닫혀 있던 뒷문이 거칠게 열렸다. "........." "........." 거의 문틀에 닿을 정도로 큰 키를 가진 학생이 한쪽 어깨에 가방을 걸친 채 조금은 의아한 얼굴로 윤세를 쳐다보고 있었다. "....정완학생인가?" "..........뭐야." 굵직한 저음. 그 낮은 울림에 윤세의 팔에 잠시 소름이 돋았다. "일단 자리에 앉도록." 완은 윤세를 못마땅한 눈초리로 훑어본 다음 거칠게 책상 위에 가방을 내동댕이쳤다. '문제아가 있다고는 말씀하지 않으셨잖습니까.' 윤세는 잠시 분만실에 있을 신선생을 원망해 보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신인순 선생님께서 어제 갑작스럽게 진통이 시작되어 급히 병원에 입원하시게 되었다. 나는 신선생님의 대리로 약 한 달간 여러분의 임시 담임을 맡게 될 이윤세다. 어차피 기말고사도 끝났고 곧 방학이니 그다지 여러분께 피해가 가진 않을 거라 생각된다. 전공은 영어. 시력이 좋지 않은 관계로 색이 들어간 안경을 쓰고 있는 것에 대해 미리 여러분께 양해를 바란다." 말을 마치고 윤세는 완을 바라보았다. 불행히도 이곳에서는 완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정완." "......." 완은 상당히 불량스런 자세로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생이 애를 낳으러 갔던 죽으러 갔던 그닥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계집애같이 창백한 피부를 한 임시 선생도 그의 관심 밖이었다. 아직까지는. "정완." "......." "대답해라, 정완." "......뭐야." 화를 내는 것도 아니고, 평온한 어조로 계속해서 불러대는 자신의 이름에 완은 잔뜩 신경질을 내며 윤세를 노려보았다. "나는 여러분에게 존경심까지 바라진 않는다. 너희 또래들이 제일 씹기 편한 상대가 담임이라는 것도 알고 있고, 없는 곳에선 나랏님도 욕한다는데 굳이 하지 말라고 하진 않겠다. 그러나 일단 너희는 학생이다. 학교라는 틀에 매여 있는 이상 최소한의 예의는 차리고 살아가라고 말하고 싶다. 이름을 부르면 대답해라. 알겠나, 정완." "뭐?" 그제야 그게 자신을 향한 말이라는 것을 알게된 완이었지만 너무 어이가 없어서 다른 말이 나오지 않았다. "'뭐'가 아니다. '예'라고 대답해라. 정완." 선글라스에 가려진 윤세의 눈은 똑바로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하!" "대답." 기가 찬 완은 물끄러미 윤세를 바라보았다. 그가 이렇게 노려보면 대부분의 선생들은 고개를 돌리며 얼버무린다. 그러나 윤세는 조금도 피하지 않고 그의 눈을 마주했다. 재미있군. 완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것은 장난감을 발견했을 때의 완 특유의 표정이었으나 윤세에게는 그 웃음이 보이지 않았다. "잘 알겠습니다. 선.생.님." 완의 대답에 윤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출석부를 집어 들었다. "조용히 자습하도록. 수업시간에 보자." 윤세가 나가고 나서도 교실 안은 숨소리 하나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천하의 정완에게 감히 대든 간 큰 신임 선생도 선생이지만 평소와 달리 자리를 떠나지 않고 살벌하게 웃고 있는 정완의 모습이 교실 안의 공기를 한층 더 냉각시키고 있었다. "할 만 합니까, 이선생?" 본래 신선생의 자리였던, 아직 예쁜 꽃무늬 방석과 사랑하는 낭군님의 사진도 채 치워지지 않은 자리에 주저앉자 옆에 있던 정선생이 툭 어깨를 치며 친한 척을 한다. "뭐, 애들이야 다 그렇죠." "아, 그 반에 정완이라는 학생 있죠?" "......그런데요?" 윤세는 조금 의아한 얼굴로 정선생을 쳐다보았다. "그다지 학교 일에 관심 없는 녀석이긴 하지만 웬만해서는 부딪히지 않도록 하세요." "...예?" 떨떠름한 윤세의 얼굴에 정선생은 몸을 조금 더 낮추고 속삭이듯 말했다. "이사장 손자에요. 걔 아버지는 성운 그룹 회장이고. 우리학교 이름이 성운고잖아요. 지금 이사장이 오늘 내일 하는 바람에 미리 유언장이 공개되었는데, 글쎄 이 학교를 손자에게 주겠다나. 내 참, 가뜩이나 망나니 미성년자에게 그리 큰돈을 덥썩 안겨줘서 어쩌겠다는 건지. 덕분에 예전엔 그나마 완이 놈에게 한마디씩 하던 교사들도 입 딱 닫고 눈치만 보고 있는 중이지요. 어쩌겠어. 교사도 사람인데. 먹고는 살아야 하잖아. 그러니까 이선생도 그 놈한테 휩쓸리지 말고 그냥 내버려둬요. 이선생이야 한 달만 참으면 되잖아요." 정선생의 말을 들으며 윤세는 점점 낯빛을 굳혔다. 역시 뒤가 있어서 그렇게 뻣뻣한 거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윤세는 연하가 기어오르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보는 성격이 아니었다. 정선생의 말대로, 한 달만 있으면 다시는 안 볼 얼굴. 어차피 임직이다. 짤려도 상관은 없는 것이다. ** 툭툭. 뭔가가 책상을 치는 울림에 완은 가볍게 어깨를 떨었다. 귀찮다. 인간에게는 라이프 스타일이라는 게 있어서 보통의 인간이라면 기본적으로 하루에 4시간 이상은 자 줘야 한다. 고로 어제 밤놀이라 하느라 날밤을 꼬박 새운 완군이 학교에 와서 내처 자는 것은 인지상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툭툭. 울림은 조금 더 심해졌다. 완은 인상을 썼다. 아무래도 저 울림은 완의 잠을 깨우려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씹. 완은 눈을 떴다. 반질거리는 흑갈색의 나무막대가 시야에 들어왔다. 뭔지는 눈감고도 알아 맞출 수 있다. 사랑의 매, 라고도 불리는 지휘봉이다. 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한 손으로는 교과서의 가운데 부분을 펼쳐서 잡고 다른 손으로 지휘봉의 손잡이를 잡은 임시 담임이 무표정한 얼굴로 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선글라스로 가려진 눈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씨댕. 완은 잠이 덜 깬 얼굴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런 모습은 여느 평범한 고등학생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정완."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윤세의 말에 완은 얼굴을 찌푸렸다. "일주일 동안 지각이 일곱 번에 무단 조퇴가 일곱 번이었다." .........그래서? 올려다보려니 생각보다 목이 아프다. 호리낭창하게 생긴 담임은 의외로 키가 컸다. 머리끝에서 들리는 윤세의 말을 흘려 들으며 완은 배가 고프다는 생각을 했다. 일주일 전에 교단에서 건방진 폼으로 예의 운운하던 선생은 무단 지각도 결석도 용납 못한다고 했다. 완은 그 말에 코웃음을 치며 보란듯이 일주일 째 지각과 조퇴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것도 딱 윤세의 눈을 피해서. 참다 못한 담임은 결국 수업 시간을 노렸나 보다. "교무실 청소 일주일." ..........뭐?! 완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저 새끼가 지금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걸까. "교무실 청소 일주일. 그 사이에 또다시 무단으로 사라질 경우 화장실 청소 일주일이 추가될 거다." ".......당신, 내가 누군진 알고 있어?" "성운고등학교 2학년 7반, 32번, 정완. 덧붙여 임시지만 내 제자. 뭐 틀린 거 있나?" 완은 속 뒤집어진다는 말을 실감했다. 같잖은 백의 좋은 점은 사고 쳐도 수습이 가능하다는 것과 학교에서 아무도 자신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귀가 따가울 정도의 잔소리도 묵묵히 들어주는 것이고. 그런데 이 선생이란 작자는 당당하게 완의 금역을 찢어발기고 있었다. "...못하겠다면?" 삐딱하게 대꾸하자 갑자기 눈에서 불이 번쩍했다. 윤세가 들고 있던 교과서로 뒤통수를 후려친 것이다. 모서리에 맞은 부위가 몹시도 아팠다. 맹세코 이렇게 무방비한 상태로 누군가에게 맞은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이 새끼가!" 190에 육박하는 거구의 완이 위협적인 눈초리로 내려다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변의 위험을 늦기고 움츠러든다. 그러나 윤세는 꿋꿋했다. "연장자에겐 존대." "밤길 조심하는 게 좋을 거요, 선생." 완의 으르렁거림은 단순한 위협이 아니었다. "그럼 오늘부터 시작하도록." 말이 끝남과 동시에 수업을 마치는 종소리가 울렸다. 윤세는 교단으로 돌아가 척척 책을 챙겨 나가버렸다. 남겨진 완은 으드득 이만 갈았다. 끼익. 반지하의 낡은 자취방의 문을 윤세는 힘들게 열었다. 갈수록 초점이 흔들리는 게 열쇠구멍도 제대로 맞추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래도 윤세는 인내심을 가지고 열심히 구멍을 더듬어 열쇠를 밀어 넣었다. 악전고투 끝에 들어온 방은 눅눅하고 후덥지근했다. 겨우 지상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창문을 열고 윤세는 자리에 앉았다. 피곤했다. 스스로가 점점 정상인의 범주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데 계속 멀쩡한 척을 해야 한다는 것은 정신적인 스트레스까지 동반했다. 윤세는 안경을 벗고 미간을 지그시 눌렀다. 드러난 눈동자는 여전히 새까맸지만 그 초점은 어딘지 모르게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가볍게 한숨을 쉬고 윤세는 서랍을 열어 약봉지를 꺼냈다. 의사의 당부가 떠올랐다. [약은 증세를 조금 늦추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서두르지 않으면 시신경이 퇴화하여 이식도 불가능해집니다.] 성장기가 끝나며 서서히 시력이 나빠지다 실명에까지 이르는 병이라고 했다. 그것이 유전에 의한 것이라는 말을 듣고 윤세는 그만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윤세는 고아다. 아직 태 중 때도 벗겨지기 전에 배냇저고리에 싸여 고아원 앞에 버려져 있었다고 했다. 원장 수녀님은 그 배냇저고리를 무슨 증표라도 되는 냥, 소중히 간직하고 있지만 윤세가 보기에 그것은 그저 흔히 볼 수 있는 배냇저고리에 불과했다. 학교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우유배달과 신문배달을 했고 좀 더 자라서는 중국집 배달과 공사장을 뛰었다. 실현 가능성이 적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대학에 가고 싶었다. 열 여덟에 고아원을 나왔고 학자금 대출을 하여 대학에 들어왔다. 과외를 한 뒤로 돈과 시간이 조금 넉넉해졌지만 그 시간에 새로운 아르바이트를 찾아야 했기에 전 장학금을 받을 성적은 되지 못했다. 군은 면제되었다. 고아라 다행이라 생각했던 적은 그 때 뿐이었다. 또래보다 3년 일찍 사회 생활을 시작하여 겨우 학자금을 갚았다. 3년이 흐른 후, 그에게 남은 것은 작은 오피스텔의 전세금과 유전병이라는 눈의 이상이었다. 처음부터 치료를 거부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수술을 하기엔 윤세의 오피스텔 전세금은 턱없이 부족했다. 마지막으로 행했던 종합 검사 결과에서 유전병임이 판명되자 윤세는 미련을 버렸다. 어차피 윤세는 버려진 아이였다. "후후후..." 윤세는 손바닥으로 눈을 가린 채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도 없는 좁은 방안에서 몸을 숙이고 터트리는 낮은 웃음은 흡사 울음소리처럼 들렸다. 2. ** 어째서 이렇게 되었을까. 통제를 벗어난 몸이 흔들리는 데로 내버려두며 윤세는 멍하니 어두컴컴한 천장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이렇게 되었을까. 모든 일의 발단이 그렇듯 시작은 단순했다. 종업식이었다. 모든 한국의 고등학교가 그렇듯이 일주일 정도가 지나면 보충수업이라는 미명 하에 다시 학교로 나와야 했지만 방학은 방학이었다. 학생들이고 선생들이고 약간은 들뜬 기색을 숨길 수 없는 상태에서 윤세는 분위기에 휩쓸려 회식자리에 끌려가 내키지 않는 술을 몇 잔 마시고 나왔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어두운 골목에서 그들을 만났다. "헤에∼ 한밤중이나 되어야 올 줄 알았는데 의외네? 충분히 기다려 줄 생각이었는데 말이야." 윤세는 한국인 남자의 평균치보다 키가 컸다. 그러나 그것은 키에 한에서일 뿐, 고아로 자라 오랜 독신생활을 한 윤세는 영양 상태가 좋지 않았다. 한밤중에 그의 앞길을 막은 남자들은 키는 윤세와 엇비슷했지만 운동이라도 하는 듯 우락부락한 덩치들이었다. 목소리를 들어서는 많아야 고등학생. 불행히도 윤세의 짐작이 맞다면 성운고이기까지 할 것이었다. 결국 윤세는 반항 한번 못해보고 어딘 가로 끌려와 줄창 맞기만 했다. "기분이 어때, 이윤세?" 오싹하도록 낯익은 저음이 들린 것은 그들의 구타가 한풀 꺾였을 때였다. 쓰고 있던 안경은 이미 어딘가로 날아가 버린 상태여서 윤세는 귀를 쫑긋 세웠다. 아니 그것은 실상 귀를 세울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정완?" "내가 밤길 조심하라고 그랬지, 선생?" 말속에 짙은 비웃음이 섞여 있다. 눈앞이 보이지 않는 것은 지금이 밤이라서일까, 아까 머리를 잘못 맞아서일까, ……시간이 다 되어서일까. "…화장실 청소가... 그렇게 하기 싫더냐." 조금 헐떡이며 말하자 퍽 소리가 나며 얼굴이 돌아갔다. "이 새끼가 누굴 애 새끼로 아나..." 애 맞잖아, 라고 생각했지만 현명하게 더 이상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뒤를 이어 기다렸다는 듯이 주먹이 다시 쏟아졌다. "이봐, 선생. 교단 위에서 맨날 내려다보고 있으니 본인이 꽤나 잘나신 줄 알았지? 어차피 백년도 살지 못하는 인생. 같이 늙어 가는 처지에 말이야." 가장 덩치가 큰놈이 윤세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키는 엇비슷한데 덩치가 크다보니 지친 윤세의 몸도 쉽게 딸려 올라간다. "당신 면상 볼 때마다 아-주- 재수가 없었다고. 알아?" 배를 한 대 치고 다시 턱을 쳤다. 어차피 일주일 정도는 학교에 나오지 않으니 아주 마음놓고 패는 모양이다. 옷자락을 꽈악 움켜잡힌 상태에서 몸이 격하게 흔들리니 후두둑 약한 단추들이 터졌다. 그 바람에 옷자락이 약간 찢겨지며 윤세의 몸은 다시 구석으로 처박혔다. "윽..." 윤세는 가늘게 신음을 흘렸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하얗던 셔츠는 여기저기 흙투성이가 되었고 단추는 터져 가슴이 드러난 데다 찢어지기까지 하였다. 연약한 새처럼 하얗고 가는 육체가 구석에 구겨져 있는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가학성을 불러 일으켰다. 안경이 벗겨져 드러난 윤세의 눈은 눈꼬리가 위로 올라갔지만 쌍꺼풀이 있었다. 시종일관 가늘게 뜨거나 아예 감고 있어 눈동자까지는 볼 수 없었지만 대신 굉장히 긴 속눈썹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속눈썹이 길게 음영을 만들며 고통에 살짝 떨리는 모습을 보며 그들은 문득 침을 삼켰다. ".......야, 완아." "왜." 완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학교에서는 세상에 무서울 것 없다는 듯이 날뛰더니 맥없이 끌려와 반항 한 번안하고 줄창 두들겨 맞는 윤세를 보니 왠지 입맛이 썼다. 학교에서 하는 행동을 보면 길길이 날뛸 것 같았는데 말이다. 뭐라 해도 교무실 벌 청소를 무시한 자신을 잡아다 기어이 화장실 청소까지 시킨 놈이 아니냔 말이다. "나 그거 해도 되냐?" ".....뭐?" 잠시 말귀를 못 알아들어 눈살을 찌푸렸다. "그거 말이야, 그거." 녀석이 음흉하게 웃으며 허리를 흔들었다. 그 미소에 다른 녀석들까지 씨익 웃음을 머금는다. 녀석들은 가끔씩 남자의 후장을 땄다. 그것은 구역싸움을 끝낸 후 승자의 영역표시이기도 하지만 남자의 뒷구멍이 의외로 맛이 좋기 때문이라고 했다. 실제로 그것은 당한 사람에게 꽤나 큰 타격을 줬지만 완으로서는 만신창이가 되어 있는 사내 녀석의 뒷구멍을 굳이 딸 필요성을 느끼진 못했다. 완은 윤세를 바라보았다. 몸을 일으키는 것도 힘이 드는지 윤세는 그저 가만히 던져진 데로 누워 있었다. 그 맥없는 모습이 '네 꼴리는 데로 한 번 해 봐라.'는 것 같아 이번에는 뭔가 울컥한 것이 치밀어 올랐다. "해." "어, 정말?" 녀석들은 완이 허락을 해 줄지 몰랐다는 듯이 오히려 눈을 크게 떴다. "잔말말고 하라고 할 때 빨리 해." 완은 눈을 감고 있는 윤세를 보며 이를 갈았다. 그래, 어디까지 그런 얼굴을 할 수 있는지 한 번 보자구. "우와, 썅. 죽인다..." 한 녀석이 윤세의 허리를 잡고 감탄사를 터트렸다. 녀석의 하체는 윤세의 엉덩이에 밀착되어 있었다. "에이, 씨. 제대로 좀 못 빨아?!" 반면에 윤세의 입안에 자신의 물건을 넣고 흔들던 다른 녀석은 윤세의 호응이 없자 그의 머리칼을 잡고 거칠게 머리를 흔들었다. 윤세는 그저 그들이 하는 데로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반항은 하지 않았지만 호응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작은 신음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멀찍이 떨어져 그 모습을 지켜보며 완은 눈살을 찌푸렸다. 꼭 시체를 윤간하는 것 같다. 저렇게 반응이 없는데도 흥분하는 놈들을 보니 변태 같다. 아니, 남자를 강간하는 거니 이미 변태인 건가. "완아, 너도 안 해 볼래? 진짜 끝내 주는데…" "…됐어. 사내새끼 후장은 관심 없다." 완은 윤세의 뒤에 붙어 있던 놈이 두 번째 사정을 하고 떨어져 나가는 것을 보며 다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이미 발 밑에는 수많은 담배꽁초들이 버려져 있었다. 윤세의 엉덩이에는 다시 다른 녀석이 붙었다. 다시 뭔가 울컥한 것이 치밀어 올랐다. 속이 쓰린 것 같기도 하고, 뭔가 주위에 있는 것들을 다 부셔 버리고 싶은 것 같기도 하다. 남색질에 시간 가는 줄 모르는 녀석들을 죄다 두들겨 패고 싶기도 하고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는 윤세의 멱살을 잡고 소리도 치고 싶다. 평소엔 생각하지 못한, 분석할 수 없는 감정들이 자꾸만 치밀어 올라 완은 머리가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꾸욱 쥔 주먹이 아파 왔다. 한참의 시간이 더 흐르고서야 녀석들은 윤세에게서 떨어졌다. "헉. 헉. 오랜만에 몸 좀 풀었네." "역시 조이는 건 남자 쪽이 낫다니까." "어이, 선생. 즐거웠수." 녀석들은 한마디씩 던지며 완에게 손을 흔들며 밖으로 나갔다. 잠시 건물 안에는 끔찍스러울 정도의 침묵이 흘렀다. 완은 꼼짝도 안하고 마치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윤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온 몸이 얼룩덜룩한 멍과 정액투성이의 윤세의 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세를 벗어난 듯한 청량함이 있었다. 마치 조금이라도 기척을 내면 사라져 버릴 것 같은 투명감에 완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있었다. "하아......" 갑자기 터진 작은 한숨에 완의 눈이 조금 커졌다. 움찔 하며 윤세의 손이 조금 움직였다. 천천히 들어올려진 윤세의 손은 먼저 눈을 덮고는 한참을 있다 바닥을 짚었다. "윽." 고통이 큰지 윤세는 상체를 일으키다만 엉거주춤한 상태로 가만히 있었다. 힘들게 몸을 일으켜 주위의 옷가지를 끌어당기는 손길이, 그 태도가 고통에 느릿하면서도 왠지 모를 차분함이 느껴져 완은 그가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별다른 반항을 하지 않았음에도 그의 옷가지는 찢어지고 헤어져 그다지 옷 구실을 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세의 얼굴에는 별다른 동요가 보이지 않았다. "꼴좋다. 기분이 어때, 선생?" "정완?!" 그것은 완이 처음으로 대한 윤세의 동요였고 찰나의 마주침이었다. 반사적으로 완을 향해 돌려진 얼굴에서 완은 크게 뜨여진 윤세의 눈동자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심해의 흑진주를 연상시키는 까만 눈동자는 아름다웠고 흑진주 특유의 흡입력을 띄며 신비하게 반짝거렸다. 완은 윤세가 휙 소리가 나도록 고개를 다시 반대편으로 돌려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그 눈동자에 몰입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달콤한 꿈속에서 한순간에 차가운 현실로 돌아온 느낌. 그 느낌은 너무나 기묘해서 기분 나쁘기까지 했다. "...아직까지 남아있었나." 목소리가 탁하게 갈라진다. 순간적으로 괜찮냐고 물어볼 뻔했던 완은 다음순간 윤세의 말을 알아듣고 눈을 치켜 떴다. "가든 말든, 그건 내 맘이지. 선생이 망가지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그걸 마다할 수야 있나." "....그래서 재미있었나." "아아, 물론." 실은 하나도 재미없었다. 뿐만 아니라 까닭 없이 울컥 울컥 올라오는 흉폭한 감정에 주먹쥔 손안에서 손톱은 손바닥을 파고 있었다. "기묘한 취미이긴 하지만 재미있었다니 다행이군." ".........어이, 어디 가는 거야?" 이미 더러워진 천쪼가리가 되어버린 속옷과 찢어진 셔츠는 내버려두고 바지와 재킷만을 걸치고 벽을 집고 힘들게 걸음을 옮기던 윤세는 완의 말에 잠시 걸음을 멈췄다. "아무리 여름이라지만 노숙하는 취미는 없는데?" 한 손으로 벽을 집고 살짝 허리를 숙인 행동에 재킷이 벌어졌다. 그 사이로 오랜 괴롭힘에 벌겋게 부풀어 오른 유두가 슬쩍 비쳤다. ......섹시하다. 완은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키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섹시? 섹시하다고? 저 선생이? 남자가? 완은 아직까지 남자에게 성욕을 느낀 적이 없었다. 아니 그 스스로가 먼저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는 게 맞다. 주위에는 이미 충분할 정도의 배출구들이 언제나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완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이 완의 중심은 어느새 조금씩 고개를 들고 있었다. "그 꼴로 나갔다간 십중팔구 다시 따먹힐걸." 스스로의 감정에 당황스러워 잔뜩 비꼬인 목소리가 나왔는데 뜻밖에도 윤세는 피식 웃어버렸다. "이미 당할 수 있을 만큼 당했는데 거기서 한 번 더 당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그 말이 완의 내부를 들쑤셨다. "그럼 나라도 상관없겠군." "뭐…?" 의아한 표정의 윤세가 몸을 돌리기 전에 뒷덜미를 잡고 거칠게 당겼다. 그나마 달려 있던 재킷의 단추가 마저 나갔다. "윽-!" 예상치 못한 고통에 윤세의 입에서 절로 억눌린 비명이 흘러나왔다. 이빨에 잘못 부딪혔는지 입술이 터져 피가 흘렀다. 완은 간단하게 윤세를 바닥에 깔고 내려다보았다. 이글거리는 완의 눈 속엔 욕정과 분노가 함께 깔려 있어 윤세는 혀를 찼다. 도대체 하고 싶은 데로 다 해놓고 왜 자기가 성질을 부리느냔 말이다. "…사내새끼 후장은 관심 없는 거 아니었나." "이제부터 관심을 가져 보려고." 완은 윤세의 바지를 한 손으로 잡고 끌어내렸다. 속옷을 입지 않은 상태에서 거칠게 휘둘린 버클이 하얀 몸에 붉은 생채기를 냈다. 긁힌 부분은 금새 부풀어올랐다. 완은 충동적으로 그곳에 혀를 대었다. "……!" 놀란 듯 윤세가 조금 상체를 일으켰다. 완은 여전히 상처에 입술을 대고 웃었다. 무표정한 선생이 뭔가 반응을 보일 때마다 완은 만족스러움을 느꼈다. 처음 보고자 했던 것은 당황과 고통이었으나 이제는 그게 무엇이든 그다지 상관없을 것 같았다. 불행히도 윤세는 충분히 당혹감을 맛보고 있는 중이었다. 버클에 긁힌 생채기를 살짝살짝 핥던 완은 이제 은근 슬쩍 다른 부위로 이동하고 있는 중이었다. ……안 더럽냐? 나 바닥에서 굴러 흙투성인데? 거기다 지금 네가 빨고 있는 허벅지는 그 놈들 정액이 가장 많이 묻었던 데다? 아니 그것보다 완의 입술이 닿는 곳마다 간질거리는 것이 절로 몸이 비틀릴 것 같다. 지루할 정도로 허벅지만 강약을 주며 물고 빠는 완의 행동에 윤세의 긴장이 조금씩 풀렸다. "…이윤세." 응? 윤세는 저도 모르게 완을 쳐다보았다. "아악-!" 눈이 마주치는 순간, 순식간에 완이 다리를 벌리고 윤세의 안으로 들어왔다. 윤세는 급작스런 고통에 비명을 막을 정신도 없었다. 눈앞에 새하얗게 변하고 숨이 턱 막혔다. 완 또한 턱없이 좁은 윤세의 내부에 고통을 느꼈다. 먼저 녀석들이 뿌린 정액이 아직 남아 있어 뻑뻑한 느낌은 덜 했지만 고통으로 근육이 긴장하는 바람에 엄청나게 조였다. "씨…발…" 완은 자신의 성기를 뺐다가 다시 한 번 찔러 넣었다. "흑-!" 비명소리는 확연히 줄어들었지만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그걸 보는 완의 심장이 따끔따끔해졌다.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항상 냉랭한 얼굴에 표정이 드리워지는 것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완이 나타낼 수 있는 표정을 폭력에 의한 고통밖에 없었다. 그것을 보고 나며 속이 시원해 질 것 같았다. 너도 고통 앞에서는 어쩔 수 없구나, 하고 비웃어 주려고 했다. ……이렇게 기분이 더러워질 줄은 몰랐다. …그런데 그만 둘 수가 없었다. 신음을 억누르느라 물어뜯은 입술이 붉게 물들었다. 그 선명한 붉은색에 취한 기분으로 완은 천천히 윤세의 입술을 핥았다. 비릿한 피맛이 입안으로 흘러왔다. 단단히 찢어졌는지 피는 계속 흘러나왔다. 결코 달콤하지만은 않은 그것을 완은 계속 맛보고 싶었다. 고통스러웠던 윤세의 내부조차 익숙해지니 황홀할 정도의 조임이었다. 천천히 움직이던 완의 행동이 점점 빨라졌다. 윤세는 이를 악물고 고통을 견뎠다. 완의 패거리들이 윤세를 강간할 때는 어딘지 멍한 상태였는데 완의 행위는 감각이 스트레이트로 뇌수를 찌르는 것 같아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헉… 헉…" 귓가에 완의 가쁜 숨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오싹오싹한 느낌이다. 그동안 의식주를 해결하는 데에만 급급했던 윤세는 성적인 감정은 백치나 다름없었다. 한껏 벌어진 다리와 배설해야 곳으로 출입하는 물건에 대한 고통과, 오싹오싹하면서도 간질거리는 알 수 없는 느낌 속에서 윤세는 뱃속으로 뭔가 뜨거운 것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정신을 잃었다. 3. 눈을 떴을 땐 낯선 곳이었다. 윤세는 제법 값비싸 보이는 집안에 어리둥절해 하다 몸을 일으켰다. "……!" 순간 현기증이 돌아 윤세는 머리를 짚고 잠시 눈을 감았다. 사각거리는 시트의 감촉이 마음에 들었지만 그것은 그가 알몸이다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해 주고 있었다. 도대체 여긴 어딜까. 윤세는 앉은 채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뿌연 시야로는 거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원룸 형식의 방은 꽤 큰 편이었다. 어리둥절해 있는 윤세의 귀에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문이 열리고, 녀석이 들어왔다. "……" "…이틀만에 일어난 주제에 그 눈초리는 뭐야." "…놔두고 갈 줄 알았는데…?" "정액까지 잔뜩 묻혀놓고 송장 치룰 일 있어?" 아, 그런가. 정액이 묻은 벌거숭이 변사체라면 확실히 강간죄와... 아, 남자는 강간죄가 성립 안 된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럼 살인죄 만인가.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이는데 어째 저놈은 아까보다 더 씨근덕거리는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다. 들어올때만해도 뭔가 기분 좋아 보였는데? "…왜?" "아무것도 아냐!" …괜히 신경질이다. "근데 여긴 어디지?" "보면 몰라? 내 집이잖아!" 내가 너네 집에 언제 와 봤다고 보자마자 너의 집인 줄 알겠냐. "내 옷은?" "넝마라 버렸어." "…안경은?" "그 와중에 안경까지 챙겨오라고?!" "…그럼 옷 좀 빌리자." 척척 일어나 옷장을 뒤지는 윤세를 완은 기가 막힌 얼굴로 바라보았다. 도대체가 말이다. 기절한 놈을 데려와(걸레 같은 옷을 수습해 택시 타고 오는 게 얼마나 쪽팔렸는데!) 씻기고(기절한 사람 무게가 좀 나가냐!), 재워주고(하나밖에 없는 침대까지 양보했는데!), 간호까지 해 주었는데(노는 거 왜에 밤을 새워 본 건 정말 처음이었다), 저 인간은 인사 한 마디 없이 오히려 옷까지 내 놓으란다. 게다가 자신을 가…… 가…ㅇ…… 하여간! 그걸 한 사람 앞에서 저렇게 나체로 다녀도 되는 거냐! 완이 그러거나 말거나 윤세는 완의 옷장 속에서 티셔츠와 청바지를 꺼냈다. 다행히 키가 비슷해서 옷은 그럭저럭 윤세의 몸에 맞았다. 허리가 좀 크긴 했지만 그건 어떻게든 골반에 걸쳐졌다. "…그럼 보충 수업 때 보도록 하지." "안가-!" 반사적으로 완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신발을 신던 윤세는 완을 잠깐 돌아보았다.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은 윤세는 애 같다. 안경이 없으면 잘 보이지 않는 것인지 완을 바라보는 시선은 약간 허공에 떠 있다. 까만 흑진주 같은 눈이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는 것이 완은 조금 서운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을 깨닫고는 속으로 경악을 했다. "싫음 말구." "이 썅-!" 그러나 완의 욕설들은 무겁게 닫히는 현관문 소리에 파묻혔다. "으…." 윤세는 낮은 신음을 흘렸다. 완의 앞에선 한껏 태연한 척 했었지만 두 시간 가까이 강간을 당하고 이틀동안 기절해 있다 일어난 몸은 이미 정상이라고 할 순 없었다. 식은땀까지 흘리며 겨우겨우 문을 연 윤세는 개지 않은 채 그대로 펼쳐진 이부자리 위에 쓰러지듯 엎드렸다. 영양분 공급을 열심히 주장하던 몸은 결국 현기증이라는 데모를 일으키며 윤세의 의식을 잡아먹었다. 가물거리는 의식 너머로 윤세는 기필코 저 놈의 자물쇠를 버튼 식으로 뜯어고치고 말겠다며 이를 갈았다. ** 뒤끝이 씁쓸하다는 말을 완은 요즘만큼 절실히 느껴본 적이 없다. 윤세가 그렇게 나가고 다시 이틀이 지났다. 완의 방은 윤세가 나간 후로 전혀 변화가 없다. 심지어 윤세가 걷어차고 일어난 이불의 형태까지 그대로다. 3일에 한 번 꼴로 오는 파출부 아주머니조차 그대로 보내 버렸다. 완은 물끄러미 침대를 바라볼 뿐 몸을 뉘일 생각은 없는 듯 했다. 덕분에 4일 째 그의 잠자리는 침대가 잘 보이도록 마주 돌려놓은 소파 위였다. "젠장." 완은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리며 소파 위에 주저앉았다. 이틀동안 저 침대를 차지하고 있던 윤세의 얼굴이 도무지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언제나 쌀쌀한 독설만 던지길래 굉장히 심술궂을 거라고 생각했던 얼굴은 뜻밖에도 꽤나 단정했다. 정작 그를 강간할 때도 느끼지 못했던 사실을 자신의 침대 위에 뉘여 놓고 나서야 깨달은 완은 아연해했다. 뽀송뽀송해진 윤세의 얼굴은 약간의 열로 불그스름하기까지 해 완은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된 자신의 몰골을 자각해야만 했다. 어쩔 수 없는 것이, 땀내는 물론 정사의 희미한 냄새까지 완의 체열에 힘입어 열심히 올라왔던 것이다. 씻고 나오자 이번에는 단순한 미열이었던 윤세의 몸이 펄펄 끓는 냄비로 변해 다시 한번 아연해 할 수밖에 없었다. 병원에 간다던가 집안의 주치의인 윤박사를 부른다는 건 이미 생각하기도 전에 패스. 남자를 강간했다는 것이 집안에 알려지게 되면 강제로 끌려가는 건 시간 문제다. 애써 이룩한 독립 시간을 단축하는 일 같은 건 절대 사절이다. 서둘러 냉장고에서 얼음을 꺼낸다, 찬 수건을 만든다 하고 난리를 치고 난 뒤엔 이미 날이 훤히 밝아 있었다. 모처럼 씻은 몸이 다시 땀범벅이 되어버렸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런 고생을 했는데도 완은 왠지 윤세가 전처럼 밉지만은 않았다. 열이 내려 몸이 좀 편해지자 몇 번 뒤척이던 윤세는 몸을 옆으로 돌려 둥글게 말았다. 이불을 손에 꼭 쥐고 턱까지 끌어올리고 잔뜩 웅크린 모습은 답지 않게 귀엽긴 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손을 내밀고 싶어질 정도로 아련했다. "내가 미쳤지..." 완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지만 그것이 윤세를 강간한 것인지, 그를 집에 데려온 것인지, 그를 그대로 보낸 것인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 윤세는 두 손에 든 짐이 점점 무거워져 오는 것을 느꼈다. 이틀만에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망가진 몸이 하룻밤에 멀쩡해지는 것은 아니다. 걸을 때마다 미묘한 곳이 아파 왔지만 그렇게 구겨져 있다 아사하는 것도 사양이라 어째저째 몸을 이끌고 장을 보러 나왔다. 일주일만에 나온 마트는 때마침 할인 행사까지 하고 있어서 몇 가지 물건을 고르다 보니 어느새 두 손 가득 마트의 로고가 찍힌 커다란 비닐봉지가 하나씩 쥐어져 있었다. "끄응..." 윤세는 결국 들고있던 짐을 대충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허리가 저릿한 게 아직 이 정도의 무게도 무리인가 보다. 가볍게 허리를 두드리며 윤세는 깜깜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예전엔 그래도 한 두 개씩 별이 보이기도 했는데 요즘은 그냥 새까맣기만 하다. "후우..." 다시 한숨을 내쉬며 윤세는 짐을 움켜쥐었다. 어쨌든 이걸 가지고 가야 한다. 봉지를 잡은 손에 힘을 쥐고 허리를 펴는 순간 요란한 오토바이의 소리가 들렸다. 배기 통에 구멍을 뚫은 저런 오토바이들은 대부분이 폭주족의 그것이다. 윤세는 눈살을 찌푸렸다. 다른 사람의 취향가지고 왈가왈부 할 생각은 없지만 주위에 폐가 되는 취향은 이미 개인적인 일이 아니다. 부아앙- 쿠당탕탕-!! 애물단지 같은 짐을 들고 다시 걸어가던 윤세는 요란한 소리와 속도로 자신을 아슬아슬하게 스쳐가 전봇대에 부딪히는 물체를 바라보다 빈 손이 되어버린 한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에 들고 있던 짐은 오토바이가 스쳐지나가며 부딪히는 바람에 그의 손을 벗어나 바닥을 구르며 내용물을 재확인 시켜 주었다. 전봇대에 걸려 멈춰진 오토바이는 아직까지 허공에 바퀴를 굴려대고 있었고 운전자는 전봇대와 오토바이 사이에서 그야말로 형편없이 구겨져 있었다. ............살아 있을까? 119를 불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윤세는 조심스레 그에게 다가갔다. 다행히 운전자는 헬멧을 쓰고 있었고 그것으로 윤세가 점치는 사망률은 절반으로 떨어졌다. '뭐, 넘어지며 전봇대에 척추를 부딪혔다라는 일도 있으니까.' 엄한 상상을 해대며 윤세는 조심스레 쓰러진 오토바이 너머로 운전자를 내려다보았다. "으으..." 헬멧 아래로 불분명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일단은 살아있군. 그렇다면 살인 방조죄가 성립하기 전에 도와주어야 할 것 같다. 윤세는 하나 남은 짐을 내려놓고 쓰러진 오토바이를 끌어당겼다. 팔에 힘을 주자 찌르르 척추를 타고 꼬리뼈까지 흘러내리는 우울한 통증이 윤세의 눈에서 약간의 젖은 물기를 뽑아 내었지만 어떻든 오토바이를 조금 세울 수는 있었다. "으윽, 젠장..." 몸을 조금 뺀 운전자는 헬멧을 벗어 던지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정완?!" 뜻밖에 아는 얼굴임을 확인한 윤세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떫은감을 삼킨 심정으로 윤세는 아직도 붙잡고 있는 오토바이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거 그냥 다시 내려놓으면 안될까? 4. "젠장... 빌어먹을..." 연신 입 속으로 중얼중얼 불만을 늘어놓는 완을 견디다 못한 윤세는 찌릿 뒤를 째려보았다. 순식간에 완은 입을 다물었지만 불만을 가득 품고 툭 튀어나온 입은 들어갈 생각을 않는다. 그래도 저 정도는 안보면 된다고 생각한 윤세는 다시 고개를 돌리고 발걸음을 옮겼다. '씹...' 터져나오는 불만을 속으로 삼키며 완은 품안의 물건을 다시 추슬렀다. 도대체 자신이 왜 이런 걸 들고 윤세를 따라야 하는지 모르겠다. 저놈의 선생은 만날 때마다 점점 사이코가 되어간다고 생각하며 완은 윤세를 놓치지 않도록 서둘러 걸음을 재촉했다. 자신의 얼굴을 확인한 윤세의 잡은 손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며 완은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그거 내려놓으면 죽여버릴꺼야!" 스스로도 조금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 소리를 들은 윤세의 얼굴에 슬쩍 웃음이 감돌았다. "날 죽이기 전에 충분히 네가 먼저 죽을 것 같은데?" "바이크에 이미 지문 다 묻었어! 경찰이 가만있을 거 같아?" "아..." 윤세는 오토바이를 잡은 자신의 손을 한번보고 완을 보며 사악하게 웃었다. "알려줘서 고맙군. 내 지문은 깨끗이 닦고 가지." 저놈의 선생이! "자, 잘못했어!!" 윤세가 손을 슬슬 놓자 완은 다급하게 소리질렀다. 일단은 살고 봐야 할 것 아닌가. "호오?" 슬쩍 눈썹을 치켜 떴지만 윤세는 오토바이를 끌어올리진 않았다. 그 무언의 압박 속에서 완은 다시 입을 열 수 밖에 없었다. "자, 잘못했습니다...." "선.생.님." "....뭐?!" 고개를 숙이고 웅얼거리듯 말하던 완은 번쩍 고개를 들고 윤세를 노려보았다. "당신, 정말..." "선.생.님." 완은 이를 갈았다. 저놈의 선생은 자신의 유리한 위치는 절대로 놓치는 법이 없다. "...잘못했습니다, 선생님." 이가는 소리가 상당히 귀에 거슬리긴 했으나 윤세는 일단 만족하고 바이크를 일으켰다. "젠장! Shit!!" 자리에서 일어나 윤세에게 바이크를 넘겨받은 완은 곧장 그것을 팽개치고 거세게 발로 걷어찼다. 윤세는 시큰둥한 얼굴로 완을 쳐다보았다. 이 더운 여름에 기운도 좋지. "다했냐?" 땀을 줄줄 흘리는 완은 찢어진 바지 사이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완은 윤세를 흘깃 보며 거칠게 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다했으면 그거 챙겨라." "......?" 무슨 뜻이지 몰라 멀뚱히 윤세를 쳐다보자 그는 친절히 손을 들어 지적해 주었다. "저거. 네가 그랬으니 책임 져야지." 윤세가 가리킨 것은 마트 로고가 적힌 찢어진 비닐. 그리고 바닥에 흩어진 물건들. .........저걸 어쩌라고? 멀뚱멀뚱 쳐다보는 완에게 윤세는 단호하게 말했다. "주워." 윤세가 지하로 통하는 계단으로 내려가는 것을 보고 완은 조금 놀란 눈을 했다. 분명히 집으로 간다고 했었다. 이런 지하에도 집이 있나...? 그런 완의 의문을 풀어주기라도 하는 듯 윤세는 반 지하의 철문 앞에서 봉지를 내려놓고 열쇠를 꺼냈다. "......" 잠시 윤세의 행동을 지켜보던 완은 눈살을 찌푸렸다. 윤세는 벌써 5분 째 대문의 자물쇠와 씨름 중이었다. 눈이 나쁜 것도 알고, 안경이 없다는 것도 알겠는데, 저 정도면 심각한 거 아닌가. "젠장, 현관 앞에서 날 새겠군. 이리 줘." 완은 열쇠를 빼앗아 문을 열었다. 한 소리 듣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다행이 윤세는 별 말이 없었다. 원룸 형식의 윤세의 방은 각오했던 것보다 더 작았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작은 개수대가 보이고 그 맞은 편에 책상과 막 빠져 나온 듯한 어수선한 이부자리들이 보였다. "화장실은 저기. 바지는 찢든지 벗든지 하고 상처는 씻고 나와." 구입한 물품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식탁 대용으로 쓰는 거 아닌지 의심스럽다) 펼쳐진 이부자리를 척척 접어 구석으로 밀어놓은 윤세가 개수대 옆에 나 있는 조그만 문을 가리켰다. 안으로 들어간 완은 운신하기도 힘들 정도의 공간에 질려 버렸다. 이거야 원, 폐소 공포증이 없는 게 다행이군. 바지를 상처가 보일 정도로 찢어 놓고 샤워기를 찾던 완의 눈에 욕실 한 구석에 놓여 있는 쓰레기 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더 정확히는 쓰레기 봉투 속에 있는 피 뭍은 천뭉치에. "......." 이 집으로 돌아와서 윤세는 또다시 피를 흘린 걸까. 그러고 보니 꽤 피곤해 보였던 것 같기도 하다. 콕콕, 하고 다시 심장이 조여오는 것을 느끼며 완은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 "천장 안 무너지니까 앉아라?" 하여간 말뽄새 하고는. 싱크대 위에 올려져 있는 휴대용 가스버너 위에서는 정체 모를 무언가가 보글거리며 끓고 있었고, 개수대에는 몇몇 야채들의 잔해가 흩어져 있었다. 완은 대충 주위를 둘러보다 이불더미에 등을 기대고 비스듬히 앉았다. 그 앞에 윤세가 약통을 들고 앉았다. "다리 내밀어." "됐어. 필요 없...!!" 그러나 완은 말을 맺지 못했다. 윤세가 상처 위에 소독약을 들이부어 버렸기 때문이다. 부글거리며 끓어오르는 하얀 거품만큼이나 상처는 지독하게 쓰렸다. "으윽." "사내새끼가 이 정도에 비명을 지르냐." 당신이 한 번 당해봐! 라고 소리치려던 완은 불과 며칠 전에 윤세가 당했던 일을 생각하고 입을 다물었다. 현관 앞에서 열쇠와 씨름하던 것과 다르게 윤세는 능숙하게 약을 바르고 거즈를 붙였다. "......잘하네." "뭐, 익숙하니까." 윤세는 다만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저 익숙하다는 말이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을 치료할 일이 잦았다는 건지, 그가 다치는 일이 잦았다는 건지 알 수 없어 완은 그저 침묵했다. 둘 중 어느 것이든 기분 나쁘기는 매 한가지라고 느끼면서. 5. 퇴근하던 윤세는 건물 옆에 아무렇게나 주차되어 있는 오토바이를 보고 슬쩍 눈썹을 치켜올렸다. 새카만 본체가 매끄럽다. 오토바이에 문외한인 그가 보기에도 꽤 값나가는 것 같다. 바이크 중에 비싼 건 자동차 보다 더한 것도 있다더니 설마 그런 종류인가... 어디로 보아도 나 새차요, 하고 광택을 내고 있는 오토바이를 보며 잠시 갸우뚱하던 윤세는 이내 관심을 끊고 지하로 내려갔다. 얼마나 비싼들 무슨 상관인가. 자신에겐 머나먼 이야기인 것을. "왜 이렇게 늦어! 배고파 죽는 줄 알았잖아." ...........누가 기다리랬냐. 커다란 덩치로 현관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완을 보며 윤세는 인상을 썼다. 물론 시커먼 안경에 가려져 별다른 효과를 보진 못했지만. "뭐해. 빨리 열쇠나 내놔." 마치 맡겨 놓은 것 같다. 그러나 완의 저런 땡깡을 하루 이틀 보아온 게 아닌 윤세는 그저 잠자코 키를 던졌다. 공중에서 멋지게 낚아챈 완은 마치 제집처럼 익숙한 솜씨로 문을 열었다. "도대체가... 땡, 하면 끝나는 선생 주제에 어딜 싸돌아 다니다가 이제야 오는 거야." 저 말버릇하고는. 뒤따라 들어가던 윤세는 손을 들어 그대로 완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으악! 왜 때려!" 때아닌 기습에 완이 뒤통수를 만지며 홱 뒤돌아보았다. "연장자에겐 존대." "으아.. 미치겠다." 완이 천장을 보며 포효를 했다. "나에게도 사생활이라는 게 있어." "웃기네." 윤세가 늦은 감이 있는 답변을 하자 완이 코웃음을 쳤다. "요 며칠동안 매일 찾아와도 당신 어디 나가는 꼴을 못 봤다, 내가." "그러는 자네는 학교나 꼬박꼬박 좀 나오시지?" 상황이 불리해지자 윤세는 말을 돌렸다. 단순한 완이 덜컥 걸려든다. "오늘은 어쩔 수 없었단 말이야, 저 놈 때문에." "저 놈?" "밖에 못 봤어?" 에헴, 하고 완의 콧대가 올라간다. "......그 시커먼 거?" "시커먼 거라니. 이래봬도 Black Bird라는 애칭이 있어." 마음이 상한 완이 인상을 썼다. 그래봤자 윤세에겐 씨알도 안 먹힌다. "아, CBR 시리즈 몰라? 저건 무려 1100이라구. 혼다의 기함이라 불리는 놈인데?" 1100인지 1200인지 내가 어떻게 아냐. "전에 타던 건 어쩌고?" "소음기 땐 바이크는 시끄러워서 싫다며..." "........." 설마 내가 한 말 때문에 오토바이를 갈아 치웠다는 거냐? "뭐.. 어차피 그건 부서지기도 했으니까.. 그거 고치고, 마후라 갈고.. 어차피 돈 들어가는 건 마찬가지니까 그럴 바엔 차라리 그냥 사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멀거니 쳐다보자 우물우물 변명하듯 완이 말했다. "아, 어차피 내 건데 당신이 무슨 상관이야. 그냥 밥이나 줘." .........그래, 네 돈으로 무슨 짓을 하건 내가 알 바는 아니다만... 왜 내가 네 밥을 차려줘야 하는 거냐. 인상을 쓰며 쳐다보던 윤세는 속옷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라, 어딜 가?" "씻으러." "내 밥은!" 완이 신경질을 낸다. 기가 막혀 그 행태를 쳐다보던 윤세는 책상 옆의 작은 냉장고를 가리켰다. "안에 된장 남은 거 있다. 데워 먹어." "뭐얏?!" 펄쩍 뛰는 완을 무시하고 윤세는 탕, 소리가 날 만큼 세게 샤워실 문을 닫았다. "..........." 쏟아지는 샤워기의 물줄기를 맞으며 윤세는 멍하니 벽에 붙은 타일을 세고 있었다. 그로서는 완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완이 그를 싫어한다는 것은 그도 알고 완도 안다. 아니,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방학 전과 비교해서 완은 조금 달라졌다. 높임말 안하고 맞먹는 것은 여전하지만 비교적 학교에는 꼬박꼬박 나온다. 등교시간은 여전히 불규칙 하지만. 수업시간에 필기는 안하고 사람 얼굴만 뚫어지게 쳐다본다든지, 종례도 받지 않고 -어쩔 땐 1교시가 끝나자마자- 어느새 사라져 버리는 건 여전하지만 얼굴 한 번 못보고 일주일이 지나갔던 예전에 비해서는 얼마나 양호한가. 문제는 그렇게 사라진 놈이 항상 자신의 집 앞에 있다는 거다. 나날이 약해져 가는 시신경을 하고 정상인 흉내를 내야 하는 윤세에게, 예고 없이 집 안으로 들어와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완의 행동은 피곤을 배로 가중시키는 일이었다. 혹시 이게 완의 새로운 전법이라면 적중했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완의 저러한 행동이 그다지 싫지 않다는 데에 있다. 저 제멋대로의 건방진 말투도, 아이 같은 투정도. 혹시 자포자기한 자신의 마음이 완의 행동을 묵인하고 있는 걸까 생각해 보았지만 그건 아니었다. 아무리 자포자기했어도 윤세는 멀쩡한 신경을 갉아먹으면서까지 완을 받아 줄 너그러움은 없었다. 그럼 도대체... 강간까지 한 놈을 자신은 어째서 그냥 두는 것일까... 결국 윤세가 샤워를 다 하고 나올 때까지 입을 내밀고 기다리던 완 덕분에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된장찌개에 밥을 비벼 먹었다. 집 안에 요리사까지 대동해 놓고 최고급으로만 입맛을 키웠을 녀석이 뭐가 아쉬워 칠 벗겨진 상위에 된장찌개 하나로 밥을 먹고 있는지 참 궁금했지만 완은 거뜬하게 두 그릇을 비워냈다. "밥 먹었으니, 좀 치워라." "에에?!" "차려 줬으니 밥값은 해야지." 펄쩍 뛰는 완을 곁눈으로 보며 윤세는 이불 더미 위에 누워 버렸다. ".......뭐야, 선생. 벌써 자는 거야?" 쭈욱 다리를 펴고 누워버린 윤세의 발에 걸리지 않게 상을 밀어 놓고 완은 조심스레 그의 안색을 살폈다. "피곤해..." 이불 더미 깊숙이 머리를 묻어 버린 윤세의 목소리는 이미 반쯤 잠겼다. 아닌게 아니라 안색이 창백하다. "....어이, 문단속은?" "귀찮아... 그걸로 잠그고 가. 하나 더 있으니까." 어, 주는 거야? 이야, 이제 그럼 기다리지 않고 집에 들어와 있어도 되는 거..........가 아니라. 쬐끄만 열쇠 하나를 들고 덩치에 맞지 않게 좋아하던 완은 정신을 차리고 윤세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이미 잠들어 버린 건지 윤세는 고른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입만 열었다 하면 칼날 같은 독설이 튀어나오고, 걸핏하면 눈에 불이 번쩍 할 정도로 머리를 쥐어 패는 남자가 어째서 잠만 들면 이렇게 조그마하게 보이는 걸까. 완이 지켜보던 가운데 윤세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모로 누워 아이처럼 몸을 웅크렸다. 처음에는 추운가, 생각했었지만 이제는 저게 잠버릇이라는 걸 안다. 사람이 왜 저렇게 불쌍하게 자는지... 할 수만 있다면 꼬옥 품에 안고 추워 보이는 몸을 쓰다듬어 주고 싶다. 문득 그런 생각까지 한 자신을 발견하고 완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도대체 10살이나 많은, 연상에 동성을 상대로 자신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그러나 생각과 상관없이 몸은 절로 반응을 하여 어느새 손은 흐트러진 윤세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으음..." 작게 잠투정을 하며 윤세는 완의 손에 얼굴을 비볐다. 그 얼굴이 너무나 천진난만하여 완은 잠시 넋을 잃었다. ".....이봐, 선생.... 나 당신 강간한 놈이야... 그거.... 기억하고 있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완은 윤세가 베고 누운 이불 뭉치를 조심스레 끄집어내어 그의 몸 위에 덮어 주었다. 6. 아침에 눈을 뜨니 세상은 암흑에 갇혀 있었다. 분명 시계소리를 듣고 깼는데 방안이 지나치게 어둡다고 생각하던 윤세는 시계를 찾는 자신의 손조차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몸이 굳어졌다. 눈이... 보이지 않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그것은 훨씬 충격이 컸다. 망연하게 다가오는 두려움으로 윤세는 두 팔로 몸을 감싸고 웅크렸다.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다. 남들이 냉혈한이라고 하니까, 본인도 그런 줄 알았다. 집을 팔고, 직장을 그만두며 마음도 그때 다 정리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두 팔로 다리를 감싸고 무릎 사이에 턱을 올린 채, 윤세는 오랫동안 요 위에 웅크리고 있었다. 끔벅끔벅, 보일 리 없는 허공을 향해 망연히 눈만 깜박이던 윤세는 어느 순간 조금씩 시야가 밝아 오는 것을 느꼈다. "......!" 윤세는 가만히 손을 들었다. 꼼질꼼질. 맞다. 움직이는 것은 분명히 손가락이다. 윤세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건 책상, 저건 냉장고, 저건 싱크대, 저건 화장실 문, 저건... 윤세는 서랍을 열어 약봉지를 꺼냈다. 약을 한 입에 털어 넣고 물도 없이 씹었다. 캡슐이 바즈락거리며 터지고 쓰기만 한 약이 침과 섞여 진득하게 입안에 달라붙었지만 윤세는 피실피실 웃었다. 그는 알지 못했지만 창 밖은 어느새 훤히 날이 밝아 있었다. "뭡니까, 이윤세 선생. 임직이라고 지금 개기는 겁니까? 월급받기 싫습니까? 신인순 선생이 아끼는 후배라기에 믿고 채용했더니 태도가 이래서 되겠습니까?" "........." "아, 입이 있으면 변명이라도 해 보세요." "저기, 교감 선생님. 이선생 수업 들어가야 하는데 좀 있다 하시죠. 어쨌든 왔으니 수업은 해야 하지 않습니까." "......나중에 봅시다, 이선생." 정선생의 만류에 교감은 신경질적으로 들고 있던 서류철을 책상 위에 팽개치고 나가버렸다. 윤세는 묵묵히 교제를 챙겨 들었다. "어이, 이선생. 진짜 들어가려구?" "..........?" "이선생 얼굴 지금 굉장히 창백해. 금새라도 쓰러질 것 같다구. 그냥 양호실에 가서 좀 누워있지?" ".......괜찮습니다." 만류하는 정선생을 뿌리치고 윤세는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양호실에 누워 있을 거면 아예 출근을 하지 않았을 거다. 그러나 확실히 수업은 무리다. 눈앞이 흐릿한 게 간신히 명암을 구별할 정도다. 드르륵. 문을 열자 낯익은 얼굴들이 후다닥 자리를 찾아간다. 2학년 7반이었군. "됐어. 앉아라." 인사를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는 실장을 만류하자 엉거주춤 하던 녀석은 잠시 주저하다 자리에 앉는다. "오늘은 조용히 자습해라. 영어 말고 다른 과목해도 괜찮으니까." 교과서와 교사용 지도서를 그대로 교탁 위에 두고 윤세는 창가로 가 기댔다. 잠시 침묵하던 아이들은 이윽고 조그맣게 부스럭거리며 각자의 책을 펼쳐든다. 그리고 윤세는 멍한 눈으로 창 밖을 응시했다. 주위는 온통 흐릿한 안개 속에 싸여 있었다. 그래도 암흑보다는 낫다고, 윤세는 스스로를 달랬다. 또 왜 저래? 완은 미간을 잔뜩 찡그린 채 윤세를 노려보았다. 이렇게 노려보면 대부분의 경우 시선을 느끼고 쳐다보던가, 알아서 고개를 숙이고 그의 시야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고래 심줄보다 더 질긴 신경을 가졌음이 분명한 저 임시 담임은 꼼짝도 안하고 꿋꿋하게 창 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그것도 나 심란하다라는 오오라를 잔뜩 풍기며. 아침조회도 안 들어 온 걸 보니 지각한 것 같은데, 평소 그의 지론이 '어차피 임직인데 짤리기밖에 더하겠냐.'라는 것으로 보아선 설마 교감이나 교장한테 야단들은 것 가지고 저러진 않을 것 같다. 그럼 도대체 왜 그러냔 말이야아아-. 하다 못 해 눈이라도 보면 속내를 짐작이라도 해 보겠지만 저놈의 시커먼 안경은 그것마저도 불가능하게 만든다. 완은 사람의 눈이 그렇게 많은 것을 표현하는 줄 예전엔 미처 몰랐다. '눈으로 말을 하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완은 그 말을 듣고 코웃음을 쳤었다. 멀쩡한 입을 놔두고 왜 굳이 눈으로 말을 하느냔 말이다. 허나 색안경으로 얼굴의 절반을 가린 데다 입만 열었다 하면 속 뒤집어지는 말을 툭툭 내뱉는 선생을 보다보면 눈이 아니라 뇌라도 갈라보고 싶은 심정이 든다. 문득 윤세가 머리를 창틀에 살짝 기댔다. 눈을 감고 느긋하게 햇살이라도 쬐고 있는 것 같다. 쳇, 더워 뒈질 것 같은 날씨에 일광욕이 웬말이냐. 기울어진 고개 덕에 매끈한 목선이 한 눈에 들어왔다. 더위에 느슨하게 당긴 넥타이와 윗단추를 연 셔츠 사이로 언뜻 보이는 살결에 이어지는 목선을 상상했다. 아니, 그것은 상상이 아니었다. 저 목에 가볍게 이를 세우는 것을 상상하기만 해도 기억이라는 놈은 편리하게 '그 날'로 되돌아갔다. 보기보다 더 마른 몸에 쇄골이 도드라져 있었지. 덕분에 목과 쇄골이 이어지는 부위가 옴폭 파여 음영을 드리우고 있었다. 폭력과는 한 번도 연관이 없어 보였던 팔은 생각했던 것보다 근육이 잡혀 있었지만 팔 안쪽은 물면 무는 데로 이빨자국이 남을 정도로 연하고 보들보들했다. 동전크기만한 유륜은 예뻤고 앙증맞은 유두는 귀여웠다. 두근. 위험한 열기가 아래로 몰리는 것을 느끼자 완은 당황했다. '그 날' 이후 뭔가 굉장히 신경 쓰이는 바람에 줄곧 윤세와 붙어 있었지만 완은 한번도 윤세에게 욕망을 느낀 적이 없었다. 뭔가 그를 볼 때마다 가슴이 저릿저릿하고 가끔은 통증까지 느껴졌지만 '그 날' 같은 흉폭한 욕망은 들지 않았기에 역시 그 날은 뭔가에 홀린 모양이다, 윤세가 이렇게 신경 쓰이는 이유는 그가 첫남자(?)였기 때문이다, 라고 나름대로 결론까지 내린지도 한참이 지났다. 본래 남자는 첫사랑(?)을 잊지 못한다고 하지 않던가. 물론 완은 동정을 버린 여자의 얼굴 따윈 기억도 못하고 있지만 그런 사소한(?) 일은 그가 신경 쓸 일은 아니다. 근데 왜 선생의 목을 보고 반응한 거지? 완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날 이후로 흥분하진 않았으니 윤세를 보고 반응한 건 아닐 거다. 목선을 보고 그 날 일까지 떠올리다니. ........그 날이 좋긴 좋았지. 따끈따끈하고 꽉 조여주고... ......읏. 점점 거북해지는 하체에 완은 눈살을 찌푸렸다. 나, 욕구불만이었나? 생각해 보니 그동안 저 신경 쓰이는 선생과 함께 지내느라고 밤놀이를 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한 게 선생이었을 정도니까. 완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오늘은 몸이라도 풀러 가야겠군. 무슨 놈의 회식이 이렇게 많은지... 윤세는 간신히 술자리 청을 물리치고 학교를 빠져 나왔다. 교장, 교감은 물론 각 부장 선생들의 눈치를 봐 가면서 마셔야 하는 술은 정말 곤욕이다. 그것도 '먹고 죽자.'라는 분위기 속에서는. 버티지 못할 바엔 처음부터 사양하는 게 낫지. '술이다, 술.' 희희낙락하며 사라진 정선생을 떠올리며 윤세는 고개를 저었다. 내일쯤에는 반송장이 되어 있다에 십만원. 어차피 보충수업은 끝났고 일주일 뒤가 개학이니 상관은 없겠지만. 곤두선 신경 탓에 콧등의 안경이 한층 더 무겁게 느껴져 윤세는 미간을 꾹꾹 눌렀다. 하루종일 눈은 형광등처럼 보였다 안 보였다를 반복했고 그것은 윤세의 신경을 깔짝거리며 갉아내고 있었다. 피곤해.. 지친 표정으로 윤세는 타박타박 골목을 들어서다 누군가에게 부딪혀 세게 뒤로 넘어졌다. "윽-!" "어이쿠, 아파라. ....어라? 이게 누구신가?" 부딪힌 어깨와 밀쳐지며 담벼락에 부딪힌 등이 몹시 아팠다. 그러나 자신을 아는 듯한, 어쩌지 좋지 않은 의도를 담은 듯한 말투에 윤세는 고개를 들고 미간을 잔뜩 찌푸려, 흩어지는 초점을 맞추려고 애를 썼다. "....누구?" "어허, 그런 식으로 말하면 서운하지, 선생. 그래도 사이좋게 배 맞대고 노 젓고 강 건넌 사인데..." .........그놈들이다. 윤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흐릿해서 정확히 얼굴을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완은 없는 것 같다. "불행하게도 우리의 미래의 이사장님은 여자가 더 좋으신 모양이더군. 뭐, 그다지 서운해하진 마. 대신 우리가 확실하게 놀아줄 테니까." 녀석들은 낄낄 웃으며 서서히 가까이 다가왔다. 윤세는 미간을 찌푸렸다. 재미가 없다. 완은 나른하게 침대에 늘어져 있는 여자를 내버려두고 호텔을 나섰다. 오랜만에 들른 클럽이지만 분위기는 여전했다. 성원그룹의 힘이 여전하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달라붙는 파리들도 여전했고. 그 중에서 간택이라도 하듯 한 사람을 골라내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유난히 눈동자가 새카만, 심해의 흑진주를 연상시키는,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있는 눈동자와 흡사한 여자를 데리고 클럽을 나선 것은 그로부터 한시간도 되지 않았을 때였다. 여자는 능숙했고 섹스는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그뿐. 예전 같은 쾌락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가까이서 본 여자의 새카만 눈동자가 칼라렌즈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는 기분이 잡치기까지 했다. 섹스후의 나른함과 적당한 취기로 완은 느긋하게 바이크에 시동을 걸었다. 선생이 보았다면 아마도 음주운전에 헬멧도 쓰지 않았다고 엄청 잔소리 할 거라고 생각하며 완은 키득키득 웃었다. 문득 언젠가 술에 취해 찾아간 다음날 끓여준 북어국의 시원한 맛이 생각나 완은 핸들을 꺾었다. 생각난 것은 단지 자신의 파출부보다 솜씨가 좋은 윤세의 북어국뿐이라는 듯. "..........?" 윤세의 집 입구인 지하 계단을 내려가던 완은 문득 이상한 기분에 슬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뭔가 굉장히 찝찝하고 불길한 기분. 한낮의 더위를 몸으로 받아낸 지표면은 이제 슬슬 그 열기를 다시 토해내고 있었다. 후끈한 열기에 맞춰 밀려오는 진득한 불쾌함.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완은 조심스레 계단을 내려갔다. 저 아래에 뭔가가 있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무언가가. ".......선생?!" 길지 않은 계단의 끝에서 완은 멍청히 윤세를 불렀다. 현관 앞에 구겨져 있는 것은 분명히 윤세였다. 천천히 그를 향해 뻗는 완의 손이 떨렸다. "....이봐?" 조심스레 그를 안아 일으키자 힘없이 목이 뒤로 꺾였다. 계단 위에서 어렴풋이 비치는 불빛에 드러난 윤세의 얼굴은 처참했다. 계단에서 굴렀는지 바닥에 닿았던 이마 쪽은 피가 맺혀 있었고 광대뼈와 턱 주위는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입술은 터져 퉁퉁 부어 있었고 거기서 흐른 피가 턱을 타고 목에까지 내려와 굳어있었다. 간신히 걸쳤다고 표현할 수 있는 재킷을 펼치자 참혹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넥타이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언제나 단정했던 셔츠는 바지에서 반쯤은 빠져 나와 있었다. 어긋나게 채워진 셔츠의 단추는 그나마 몇 개 있지도 않았다. 그리고 벌어진 셔츠 사이로 보이는 숨길 수 없는 흔적들... "이...!" 완은 이를 악물었다. 피가 머리끝까지 솟구친다는 말을 실감했다. "어이, 선생! 눈 떠! 뜨란 말이야! 이윤세!!" 완은 다짜고짜 윤세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끓어오르는 살의를 당장 어떻게 하지 않으면 눈앞의 윤세라도 죽일 것 같았다. "이윤세!" 짜악- 하는 소리와 함께 뺨이 돌아갔다. 창백한 뺨 위에 손가락 다섯 개의 흔적이 뚜렷이 남았다. "으..." 고통에 반응한 육체가 희미하게 깨어나기 시작했다. "이윤세! 나 누구야? 나 알아 보겠어?" 몇 번 파들거리던 눈꺼풀이 서서히 벌어지며 초점을 잃고 불안하게 떨리는 새카만 눈동자가 드러났다. "....정... 완..?" "그래. 나 정완이다. 그러니까 말해. 당신 이렇게 만든 녀석이 누구야." "......" 나직하게 이를 가는 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윤세는 그러나 이내 눈을 감아 버렸다. "이윤세! 눈 안 떠?! 누구냐니까! 말해!!" 멱살을 쥐고 그를 끌어당겼다. 목이 죄어 숨이 막힐 텐데도 윤세의 얼굴에 나타나는 것은 퍼석한 웃음뿐이었다. ".......알아서 뭐하게?" "뭐하다니-!" 주리를 틀어 뼈를 갈아 마실 거라며 씩씩거리던 완은 다음순간 그를 똑바로 직시하는 새카만 눈동자에 숨을 들이켰다. 이 눈동자를 이렇게 정면으로 바라본 것은 '그 날' 이후로 처음이었다. 홍채와 동공이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새카만 눈을 홀린 듯이 바라보던 완은 하마터면 윤세의 말을 놓칠 뻔 했다. "까불지 마..." "......뭐?" "누가.. 누굴 벌하겠다는 거냐... 모든 일의 원흉인 자식이...!" ".......!" 손에서 힘이 스르르 빠졌다. 덕분에 윤세는 다시 땅바닥으로 쓰러졌다. 말 한마디하는 것도 힘이 부친 듯 색색 숨을 몰아쉬는 그는 눈을 감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 넋을 잃은 듯 그를 바라보던 완은 윤세의 숨소리가 점점 잦아들고도 그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자 천천히 다시 그를 끌어안았다. 잠이 든 듯 보이지만 사실상 기절한 윤세를 완은 집안으로 들어와 조심스레 요 위에 눕혔다. 타박상을 비롯해 온 몸이 울긋불긋하지만 생명에 지장이 있어 보이진 않는다. 이불을 들어 배 부위만 살짝 덮어 주고 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다려. 곧 돌아올 테니까." 들릴 리 없는 윤세에게 다짐하듯 말하고 완은 문을 닫았다. 철컥, 하고 현관문이 잠기는 소리가 적막한 집 안에 울려 퍼졌다. 7. 깊은 어둠 저편 나락으로 떨어져 있던 의식이 서서히 부상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느꼈던 것은 빛도, 소리도 아닌 온기. 얼굴에 잠시 와 닿았다 떨어진 온기는 아쉬워하는 사이 조금 더 따뜻하고 젖은 무언가와 함께 돌아왔다. 처음의 온기에 비해 뜨겁다 싶을 정도의 젖은 그것은 얼굴을 꼭꼭 누르고 다시 사라졌다. 그리고 찰박거리는 물소리... .....소리? 윤세는 촉감에서 청각으로 주의를 옮겼다. 머리맡 부근에서 찰랑찰랑 물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주루룩,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다시 젖은 온기가 얼굴을 꼭꼭 누른다. 그때마다 왠지 얼굴이 쿡쿡 쑤시는 듯 했지만 상쾌함이 더 강했기에 윤세는 기분 좋게 그것을 받아 들였다. 젖은 온기는 목덜미와 손까지 꼼꼼히 닦아내고는 사라졌다. 달그락거리는 인기척. 그래, 그건 확실히 인기척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윤세의 의식은 찬물을 뒤집어쓰듯 일시에 현실로 돌아왔다. 여긴... 어디? 의식은 돌아왔으나 눈을 뜨진 않았다. 아니, 뜰 수 없었다. 예전처럼 눈을 떴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 누워 있는 곳은 몸이 푹 가라앉아 있는 것 같은 폭신한 매트, 몸을 덮고 있는 것은 얇은 면 이불.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서늘한 방 공기. 이것만 보아도 그가 있는 곳이 집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곳은 어디인가. 실명의 두려움과는 또 다른 종류의 불안이 그를 덮쳤다. 눈을 뜰까말까 망설이던 사이에 인기척은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가볍게 이마에 닿는 온기. 이제는 뚜렷하게 느껴지는 그것은 사람의 손이었다. 한없이 다정하게만 느껴지는 그 온기에 윤세는 용기를 가지고 눈을 떴다. "........." 눈을 뜨자마자 이마 위의 온기는 후다닥 사라졌다. 시야는 여전히 뿌연 안개에 둘러싸여 있었다. 몇 번을 깜박여보아도 깨끗해지지 않는 시야에 속으로 한숨을 쉬며 윤세는 손이 사라진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생각보다 그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다. 고개를 돌리려는 간단한 행동에도 온 몸이 비명을 질렀다. "으..." 입술이 살짝 벌어지며 절로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 또한 거칠게 갈라졌다. 어떻게 된 거야... 믿을 수 없는 몸 상태에 이를 악물며 일어나려고 하자 누군가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손길. "당신 아직 환자야. 그냥 누워 있어." ".......!" 정완?!! 너무 놀라서 순간 아픈 것도 잊어버렸다. "너... 어떻........ 여..... 긴....." "기억 안나? 당신 내 앞에서 기절했잖아. 그래서 그냥 데려왔어. 여긴 내 집이고." "........." 시야도 안 보이는데다 황당하고 기가 막혀서 윤세는 잔뜩 인상을 쓰고 완을 바라보았다. 그걸 오해한 완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왜 그래? 또 아파?" "너......!" 비로소 보인 완의 얼굴에 윤세는 입을 딱 벌렸다. "응? 왜? 목말라? 물줄까?" "너... 얼굴......" "아..." 완은 머쓱한 듯 얼굴을 뒤로 물렸다. 금새 그 얼굴은 뿌연 안개 속에 묻혀 버렸지만 이미 윤세는 빨갛고 파랗게 부어오른 광대뼈와 밤탱이가 된 눈두덩이, 찢어지고 부어 터진 입술을 똑똑히 보았다. "별거 아냐. 부딪혀서 그래." 어떻게 부딪히면 그렇게 골고루 터질 수가 있냐... 윤세가 인상을 쓰며 쳐다보자 완은 짐짓 이불을 목까지 끌어 덮어주며 토닥거리기까지 했다. "좀 더 자." "......." 일단 틀린 말은 아니니... 자고 보자. 윤세의 눈이 다시 감겼다. 눈을 감자마자 이내 잠이 든 윤세를 보는 완의 얼굴 복잡했다. 대체 저 선생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처음 그가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을 때는 진짜 피가 머리끝까지 솟았다. 완전히 뚜껑이 열려, 당장 다친 윤세보다 그를 그렇게 만든 녀석들을 잡아 족쳐야 할 정도로 눈에 뵈는 게 없었다. 손에 잡히는 데로 주먹을 날렸고 그만큼 얻어맞았다. 끓어오르는 흉폭한 감정 때문에 아픈 줄도 몰랐다. 결국 세 녀석 모두 바닥에 뻗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겨우 제정신이 들었다. 윤세-! 차가운 바닥에 누워 있을 윤세가 생각난 것은 그때였다. 아무리 여름이라고 해도 맨 바닥에서 아픈 몸이 괜찮을 리 없다. 허겁지겁 택시를 타고 윤세의 집으로 갔다. 윤세는 완이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누워 있었다. 달라진 거라면 몸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는 거. 완은 이불 째 윤세를 싸안고 그대로 집으로 와 버렸다. 그리고 이틀. 때가 되면 따뜻한 물에 적신 수건으로 몸을 깨끗이 닦고 약을 발라 주었다. 방학 시작할 무렵에 녀석들과 윤세를 강간한 뒤 집으로 데려왔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다. 그러나 그 때는 단순한 호기심과 변덕이었다면 지금은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아프다. 옷을 벗기고, 온 몸의 상처들을 확인할 때마다 완은 녀석들에 대한 살심(殺心)이 무럭무럭 솟아올라 주먹을 움켜쥐어야 했다. "이윤세..." 완은 나직이 그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완의 말이 들리기라도 하는 듯 감은 눈이 파르르 떨린다. 완은 요 이틀 간 그래왔듯이 가만히 윤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조심스럽고 다정한 손길이다. "음..." 작은 신음성에 완은 후다닥 손을 땠다. 잠을 깨워버렸나 했지만 윤세는 몸을 몇 번 뒤척이기는 했지만 눈을 뜨진 않았다. 잠결이라 아픈 것도 모르는지 끙끙거리면서도 기어이 몸을 둥글게 말고야 만다. 저렇게 움직이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 낫긴 나았나 보다. 가장 좋아하는 잠버릇을 하고도 끙끙거리는 윤세가 어쩐지 고양이 같다는 생각을 하며 완은 아프지 않도록 가만히 그의 몸을 주물러 주었다. 뭔가 코를 자극하는 냄새에 윤세는 눈을 떴다. 고소한 참기를 냄새에 섞여 희미하게 탄내가 난다. 뭐지? "아, 씨발..." 윤세는 소리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음, 움직임이 아까보다 훨씬 낫다. 몇 번 눈을 깜박이자 주방 쪽에서 서성이는 인형(人形)이 희미하게 보인다. 탄내가 좀 더 심해졌다. "젠장..." 벅벅 머리를 긁던 그가 신경질 적으로 돌아서다 윤세를 보고 몸을 굳혔다. "어..... 일어났어?" 표정은 안보이지만 말투에는 상당히 민망함이 묻어 나온다. "......후드 틀어." "응?" 완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거기, 가스렌지 위에 후드. 팬 말야." "아..... 이거?" 생전 처음 보는 물건이라는 듯 요리조리 기계를 살피던 완이 겨우 후드를 작동시키고 침대로 다가왔다. "배... 안고파?" ".......그다지." "그래도 든 게 없으니 뭐라도 먹어야 할텐데..." 말을 흐리며 완은 흘깃 주방 쪽을 바라보았다. "아줌마가 죽을 좀 끓여 놓고 가긴 했는데..." "......." 아무래도 탄내의 정체는 죽이었나 보다. "됐어. 어차피 생각 없으니까...." 윤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심하게 삐걱거리긴 했지만 전혀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다. "뭐 하는 거야." 끙, 하고 침대 밑으로 발을 내리자 완이 얼굴을 굳혔다. "그동안 신세졌다." "당신 아직 안 나았어. 그냥 누워." 완의 목소리가 무섭도록 낮아졌지만 윤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맨 정신으로 남의 집에 계속 신세질 정도로 뻔뻔하진 않아." "그게 왜 신세야! 그건 전부-!" 모든 시발점이 자신이라고는 완도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윤세는 픽 웃어버렸다. "그래? 그럼 내가 신세진 건 네가 빚 갚은 거라고 하자. 됐지?" 자리에서 일어나자 순간적으로 현기증이 핑 돌았지만 비틀거릴 정도는 아니라 윤세는 태연하게 완을 스쳐 지나갔다. "이윤세..." 등뒤에서 들린 음침한 목소리에 윤세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냥... 몸이 다 나을 때까지만 있어 달라는 거야. 그것도 안 돼?" "말했잖아. 그 정도로 뻔뻔하진 않다고." 서로 등을 돌린 채라 보일 리 없는 어깨를 으쓱하며 가벼운 어투로 말했다. 부스럭거리며 완이 몸을 일으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맨 정신이 아니면 되겠군." "뭐-!?" 뒤를 돌아볼 틈도 없이 앗, 하는 사이에 윤세는 거칠게 어깨를 잡혀 침대위로 내동댕이쳐졌다. "윽..." 몸이 크게 튀어 오르며 덜 풀린 근육들이 비명을 질렀다. 몸을 바로 잡을 겨를도 없이 완이 그 위를 타고 눌렀다. "뭐 하는 거야!" "맨정신으로는 있을 수 없다고 했지? 그럼 정신 없게 만들어 주지." 좌악-, 잠옷 대용으로 입혀 놓았던 희색 면 티셔츠가 목덜미에서부터 찢어졌다. 채 아물지 않은 흔적이 보랏빛이 되어 윤세의 몸을 여전히 물들이고 있었다. 완은 윤세의 목덜미를 덥석 깨물었다. 애무의 수준이 아닌 그야말로 피가 나올 정도로. "아악-!" 화끈한 통증에 이어 강한 압력으로 목살이 빨렸다. 빠는 건지 물어뜯는 건지 무지막지하게 목을 씹어대는 완의 행위에 윤세의 몸은 고통과 혐오감으로 부들부들 떨렸다. "놨-!!" 거칠게 몸부림을 쳤다. 마구잡이로 휘두른 팔다리가 완의 몸을 내리쳤지만 완은 그저 목에 묻었던 머리를 들었을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개새끼-! 뭐 하는 짓이야!" 퍼억, 하고 팔꿈치가 완의 턱에 박혔다. 가뜩이나 울긋불긋한 곳에 정통으로 박혔으니 꽤나 아팠을 텐데도 완은 내지른 방향으로 잠시 고개만 돌아갔을 뿐 윤세를 누르고 있는 힘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오히려 날뛰는 윤세의 팔을 잡아 머리위로 눌렀다. "놔앗-!!" 팔다리가 눌려 꼼짝도 못하는 상황이나 윤세는 온 몸으로 반항했다. 아무리 작고 힘이 없다고 해도 성인남자. (게다가 윤세는 결코 작은 키도 아니다.) 그가 죽을힘을 다해 몸부림치자 힘으로 누르고 있는 완의 얼굴에도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기실 미친 듯이 날뛰는 윤세의 몸은 누르고 있는 것 만으로도 벅찼다. 그것은 맨 처음 완이 녀석들을 시켜 윤세를 강간할 때와는 확실히 다른 반응이었지만 둘 다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 이를 악물고 몸부림치는 윤세를 누르던 완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의 복부에 주먹을 꽂았다. "커헉..." 내장이 뒤집히는 충격에 윤세의 몸이 반으로 접혔다. 완이 잡고 있던 손을 풀었지만 배를 움켜쥐고 모로 누운 윤세는 컥컥 짧은 숨만 내쉴 뿐이었다. 그런 윤세를 완은 손쉽게 뒤집어 잠옷 대용의 얇은 체육복을 속옷 째 끌어 내렸다. 뽀얀 엉덩이가 눈앞에 드러났다. 밑에서 미약한 저항이 계속 되었지만 배에 손을 넣어 허리를 들어올리고 뒷통수를 침대에 누르는 것으로 간단하게 저지했다. "으..." 윤세의 입에서 정체 불명의 소리가 세어 나왔다. 몸에 아로새겨진 거친 흔적에 대한 기억은 처음에는 무감각으로, 다음에는 극심한 혐오감으로 다가왔다. 윤세의 머릿속에는 그저 '안 돼.'와 '싫어.'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큭..." 꼼짝도 할 수 없이 눌린 상황에서 윤세는 토할 것 같이 극심한 공포심과 혐오감으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드러난 엉덩이가 서늘하다. 항문 근처에 뜨거운 열기가 와 닿았다. "놔아..." 미약한 항의는 간단히 무시되었다. 무자비하게 입구를 열고 들어오는 뜨거운 불기둥을 끝으로 윤세의 의식은 백지가 되어 날아갔다. 8.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 그리고 간간히 들리는 훌쩍이는 소리. 윤세는 멍하니 흐릿한 천장을 바라보며 들리는 말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니야.. 이럴.. 이렇게 하려고 했던 건... 이럴 의도는 아니었어... 그냥...... 나는 단지... 당신은 언제나 냉정하니까... 그냥 얼굴을 보고 싶었던 건데... 근데 가슴이 아파서... 그래도 밀어내지 않아서... 기뻐서.... 나는 그냥 당신이 좋은데... 당신은 눈뜨자마자 나갈 궁리만 하고... 그냥 순간적으로 화가 나서..." "너는..." 횡설수설한 얘기를 들을수록 기가 찬 윤세는 남은 힘을 끌어올려 입을 열었다. "선생-?!" 침대 밑에 주저앉아 있던 커다란 덩치가 후다닥 다가왔다. "건드리지 마!" 날카롭게 튀어나온 말을 쇳소리가 되어 갈라졌다. 완은 얼른 동작을 멈추고 손을 들었다. "아, 안 건드려. 아까도 아무 일 없었어. 당신 그냥 기절한 거야. 다행이다... 계속 눈을 안 떠서 정말 놀랬어." 스윽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는 녀석의 얼굴은 영락없이 애다. 윤세는 절로 한숨이 나오는 것을 느꼈다. "너, 나 좋아하냐." ".....!" 완의 몸이 굳었다. "그러니까..... 그게......" 짐짓 허공을 바라보는 완은 민망해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너는 좋아하는 사람은 무조건 강간부터 하고 보냐." "아냐-!" 완은 펄쩍 뛰었지만 윤세는 가차없었다. "아니면. 네 행동에 대해 설명해 봐. 처음엔 하는 짓이 맘에 안 든다고 친구들 시켜 강간하고, 그 다음은 이왕 강간한 거 두 번은 어떠랴 하고 직접 박고, 다음에는 너는 이제 재미없으니 하고 싶으면 너희들끼리 하라며 애들을 보내?" "아냐-!!" 윤세의 말을 듣는 완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아냐, 내가 시킨 게 아냐. 나도 그 녀석들이 또 당신에게 간 줄 몰랐어. 처음 이후로는 그 녀석들 만난 적도 없어. 진짜야..." "웃기지마. 설사 네가 시킨 게 아니라고 해도 애초에 네가 벌인 일이다. 게다가 이번엔 집에 가겠다는 사람을 붙잡아 폭력에 강간을 해? 그러고도 뭐? 좋아해?" "그럼 어떻게 해!" 완이 주저앉은 땅바닥으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몰랐단 말이야... 좋아한다는 게 어떤 건지, 좋아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모른단 말이야... 아버지는 매달 쓰고도 남을 정도의 돈을 비서를 통해 줘. 그 사람 얼굴 볼 수 있는 건 일년에 몇 번 되지도 않아. 나를 좋은 친구라고 말하는 녀석들은 내 지갑만 쳐다보고 있어.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여자들은 하룻밤의 쾌락과 비싼 선물을 원해... ............나는... 단지 당신이 보고 싶을 뿐이었어. 그렇다고 당신한테 돈을 줄 수도 없잖아!" 뚝뚝 바닥으로 떨어지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안하고 완은 악을 쓰듯 외쳤다. "아직 젖도 못 땐 애송이 자식이..." 그야말로 어린아이의 투정에 지나지 않는 완의 외침에 윤세는 허탈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화가 한 풀 꺾인 듯 한 윤세의 태도에 완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안 그럴 게. 당신이 싫어하는 짓은 절대로 안 할게. 어차피 보충수업 끝났잖아. 그냥 여기 있으면 안 돼? 그냥 다 나을 때까지만 있어. 그 다음엔 당신발로 어딜 가든지 상관 안 할게... 응?" ".......선생님." "응?" 땅바닥만 뚫어져라 쳐다보며 애원하듯 중얼거리듯 완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윤세는 입술을 깨물었다. 제길... "연장자에겐 존대. 난 네 선생이다." "그럼..." 어리둥절해 하던 완의 얼굴이 환해졌다. 역시 손해보는 것 같다. "알았어!" 크게 고개까지 끄덕여 대답한 완은 윤세가 누워있는 시트 자락을 조심스럽게 말아 쥐고는 살며시 이마를 댔다. "좋아해... 진짜 좋아해, 선생..." 몇 번이고 중얼거리는 완의 어조에 윤세는 그저 크게 한숨만을 내쉬었다. ** "...또 태웠냐." 침대 위에 앉아 책을 읽던(읽는 척을 하던) 윤세는 한숨을 내쉬고 주방 쪽을 바라보았다. "아, 아냐..." 후다닥 소리와 함께 완이 후드를 틀었다. "아니긴 뭐가 아냐. 탄내가 여기까지 풍기는데. 그러길래 내가 한다니까..." "오지마. 그냥 누워 있어. 당신 아직 움직이면 안돼." "선.생.님." "응, 선생." 건성으로 대답하고 완은 슬금슬금 휴대폰을 들었다. "뭐하는 거냐." "응? 아니.. 그냥.. 시켜 먹을까 해서..." "저건?" 가스렌지 위의 냄비를 턱짓으로 가리키자 애매모호하게 웃으며 슬금슬금 몸으로 가린다. "그냥.. 아줌마 밥만 먹는 것도 지겨우니까 우리 시켜먹자... 내가 전복죽 잘하는 데 아는데... 응?" ".....가지고 와 봐." "어이, 선생..." "한 입으로 두말하게 할래?" '아, 젠장...' 따위를 중얼거리며 쟁반에 죽그릇을 담아 오는 완은 기가 팍 죽은 거대한 강아지 같다. 윤세는 완에게 받은 쟁반을 무릎 위에 놓고 멀거니 쳐다보았다. 하얘야 할 죽은 군데군데 정체불명의 검은 이물질이 섞여 있다. 윤세는 숟가락으로 슬슬 저어 이물질을 피해 죽을 떴다. "먹지마. 탄 거 먹으면 안 좋아." 완이 인상을 썼다. "됐어. 그럭저럭 괜찮네. 근데 넌 어째 데우는 것 하나 못하냐? 재벌집 애들은 다들 그래?" ".........강현인 안 그래." "...누구?" "있어. 고종사촌. 당신이랑 비슷한 나이." "형을 이름으로 부르냐?" 인상을 쓰고 바라보자 완은 장난꾸러기처럼 씨익 웃었다. "당신한테도 반말하는데 뭘." .....말을 말자. 윤세는 묵묵히 죽을 떠 넘겼다. 윤세가 완의 집에 머무르기로 한 뒤부터 완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험악한 분위기가 사라지고 뭔가 조금이라도 윤세에게 더 해 주고 싶어서 안달이 난 듯한 모습이 버림받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아이 같았다. 착잡한 심정으로 윤세는 완을 보았다. 전혀 다른 듯 하면서도 윤세와 완은 묘한데서 비슷한 점이 있다. 그것은 버림받은 아이들 특유의 황폐한 심장. 하나는 폭력으로 하나는 무심함으로 그 심장을 감추고 있을 뿐, 본질은 같다. 버림받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아이는 실상 버림받은 아이들이다. 한번도 버림받아 본 적이 없는 아이는 자기가 버림받았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오랜 시간 세상에 홀로 내동댕이쳐진 후에야 혼자가 되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그러나 혼자 살아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가오는 온기를 뿌리치지 못한다. 결국은 다시 버림받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이번에는...'하는 미련이 망설임을 밀어낸다. 그것이 버림받은 아이들... "무슨 생각해?" 휙휙 눈앞에서 손이 왔다갔다한다. 윤세는 인상을 쓰며 슬쩍 몸을 뒤로 뺀 다음 다시 죽을 떠먹었다. 완은 실실 웃으며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살짝 내려 뜬 눈 밑으로 길다란 속눈썹이 그늘을 만들고 있다. 붓기가 빠지고 약간의 멍들만 남아 있는 얼굴은 창백하면서도 아름답다. 멍하니 그 얼굴을 쳐다보고 있으려니 윤세가 숟가락을 멈추고 완을 노려보았다. "뭘 봐?" "당신." "......왜?" "당신 눈이 참 이뻐. 그거 알아? 새카만 게 꼭 강아지 같애." "...............웃기네." 생글거리며 쳐다보는 완의 시선을 피해 윤세는 고개를 돌렸다. "쳐다보지 마." "왜?" "눈 맞추는 거... 별로 안 좋아해." 분명히 제대로 초점이 맞지 않는, 허공에 뜬 눈 일게다. "그럼... 다른 건 맞춰도 돼?" "뭐?" 갑자기 낮아진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 윤세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완의 얼굴이 바로 코앞에 있어 깜짝 놀랐다.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예들 들면... 입술... 이라던가..." 시선이 섞여 서로를 옭아매다 문득 완은 슬쩍 눈을 내려 윤세의 입술을 보았다. 바르르 떨리던 입술이 홱 고개를 돌림과 함께 시야에서 사라졌다. "....안 건드린다고... 했잖아." 태연한 척 내뱉은 말은 그러나 끝이 조금 갈라졌다. "싫어하는 짓은 하지 않는다고 했었지." 슬쩍 턱을 잡아 고개를 돌리려고 했다. 그러나 의외로 윤세가 완강하게 버티자 완은 엄지손가락을 들어 입술을 쓰다듬었다. "당신 내가 키스하는 거 싫어하지 않잖아. 설마 내가 밤마다 키스할 때 정말로 자고 있었다고 말하는 건 아니겠지?" "너...." 어딘가 분해하는 기색의 윤세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완은 윤세의 관자놀이에 쪼는 듯한 키스를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좋아해... 좋아해, 이윤세. 진짜 좋아해..." 관자놀이에서 시작된 키스는 광대뼈와 뺨을 거쳐 턱으로 내려오더니 기어이 보드라운 입술을 덮쳤다. 촉촉한 혀가 제 집인 양 들어와 입안을 애무한다. 그것은 따뜻했고 묘한 충족감을 주었다. 진짜로 버림받지 않기 위해 애쓰는 아이는 과연 누구일까. 버림받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붙잡는 자는 누구? 버림받지 않기 위해 차라리 버리려고 하는 자는 누구? 윤세는 부드럽게 등과 가슴을 만지는 완의 손길을 느끼며 차라리 눈을 감아 버렸다. 9. "선생." 소리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푹, 하고 손가락이 볼을 찌른다. "너..." "하핫-" 신나게 웃으며 완은 소파를 타 넘어 그의 발치에 앉았다. "까분다." "맨날 당하면서 폼 재기는." 윤세는 다시 시선을 TV로 돌렸다. 시선은 TV에 고정한 채 귀를 기울여 청취를 하고 있는데 문득 발등이 간질간질하다. 스윽 내려다보니 바닥에 앉아 소파에 등을 기대고 있던 완이 손가락으로 발등을 살살 쓰다듬고 있었다. "......뭐하냐?" "발 만져." "왜?" "이뻐서." "........" 대꾸하는 대신 윤세는 발을 끌어올려 소파 위에서 양반다리를 했다. "좀 만지면 어때서. 닳는 것도 아닌데..." "닳아." 입을 삐죽이는 완이 생각지도 못하게 귀여워 윤세는 피식 웃다가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보이지 않았다. 그저 뿌옇기만 하던 시야가 가장자리부터 서서히 어두워져 가고 있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 굳어버린 윤세에게 완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들이밀었다. 윤세는 고개를 돌렸다. 텅 비었을 동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선생?" "그냥... 기분이 좀 안 좋을 뿐이야. 상관 마." ".....침대로 갈래?" "상관하지 말랬잖아!" 팔을 잡는 완의 손을 강하게 뿌리쳤다. "........" "......." 그 과격한 반응에 뿌리친 윤세도 내쳐진 완도 한동안 몸을 굳힌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잠시 입을 뻐끔거리던 윤세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차마 미안하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기분 안 좋다고 했잖아... 그냥.. 좀 내버려 둬..." 한결 가라앉은 목소리. 윤세는 완을 외면했다. 아무 말 없이 그를 쳐다보고 있는 완의 시선이 느껴졌다. "........" 한참 후에 완은 한숨을 내쉬고 몸을 일으켰다. 드디어 포기하고 자리를 뜨려나 보다. 안도감에 윤세의 몸에서도 살짝 힘이 빠졌다. 그 순간 몸이 번쩍 들렸다. ".........!!" 놀라 얼결에 손을 뻗어 잡히는 것을 움켜쥐었다. 손아귀에 잡힌 완은 팔은 단단했다. 흐트러짐 없이 자신을 지탱해 주는 단단한 근육. 완은 성큼성큼 걸어 윤세를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너.. 뭐냐." "기분 안 좋을 때는 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소파는 불편하잖아." "......" 윤세는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고개를 숙이고 시트를 쳐다보고 있는데 살짝 앞머리가 넘겨졌다. 그리고 이마에 닿는 따뜻한 기운. "내가 뭔가 거슬리게 했다면 미안해. 화 풀고 잠시 쉬어." 이마에 입술을 댄 채 말하는 완의 어조는 다정하여 윤세는 마음이 저려 오는 것을 느꼈다. "완아..." "응?" "네 얼굴... 만져 봐도 될까?" "...........물론이지." 잠시 머뭇거리던 완은 윤세의 손을 들어 자신의 볼에 대었다. 윤세는 가만히 그의 얼굴을 쓸었다. 이마 넓이는 이 정도.. 눈썹이 짙구나... 콧날은 오똑하고.. 피부는 조금 거친 편. 입술은 도톰하고 부드럽다... 이제 겨우 반 맹인이 된 자신이, 청각도 촉각도 둔하기 짝이 없는 자신이 과연 이 얼굴을 기억할 수 있을까... 윤세의 손이 얼굴을 쓰다듬고 입술에 머무르자 완은 살며시 그의 손을 잡고 손끝에 키스했다. 손가락 하나하나의 끝을 살짝 깨물고 혀로 핥는 완의 행동을 윤세는 그저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키스.. 해도 돼?" "........." 침묵을 동의로 받아들인 완은 손을 당겨 그를 끌어안으며 입을 맞췄다. 맞닿은 피부는 뜨거웠다. 입 안 구석구석의 성감대를 찾아 헤매는 혀놀림에, 온 몸 구석구석의 감각을 일깨우는 손놀림에 윤세는 몇 번이나 하늘 높이 치솟았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아득함을 느껴야 했다. "하아..." 참을 수 없어 터져 나오는 엷은 한숨에 손놀림이 조금 더 분주해 진다. "으응..." 윤세는 그저 눈을 감고 느꼈다. 볼 수 없는 만큼, 앞으로 많은 시간을 이 감각을 기억할 수 있도록. 자신에 대해서는 잊고 최대한 몸을 열어 그를 받아 들였다. "윤세... 윤세..." 다급하면서도 간절한 음색이 몇 번이고 귓가에 속삭여 졌다. 팔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 당겼다. 꽈악 힘있게 마주 끌어당겨졌다. 두근두근 심장 박동 소리가 들린다. 누구의 것인지 모르겠다. 두근두근 힘찬 소리는 머릿속에 울려 퍼지더니 마침내 온 몸이 심장이 된 것처럼 크게 맥박치기 시작했다. "하.. 핫... 아..." 목덜미와 핑크빛 유두, 겨드랑이와 팔 안쪽의 약한 부분, 허리와 허벅지 안쪽... 윤세가 미처 알지 못했던 '느끼는 부분'을 완은 윤세가 끝내 다급한 호흡을 뱉을 때까지 끈질기게 괴롭혔다. "완... 그만..." "한 번 더..." "......?" 턱 가에 작게 쪼는 듯한 키스를 되풀이하던 완이 입술을 스칠 듯이 맞대고 속삭였다. 의미를 알 수 없어 윤세는 작게 눈을 깜박였다. "이름.. 한 번 더 불러 줘..." "와...ㄴ... 읍-!" 목소리는 거칠게 덮쳐 오는 완의 입술에 파묻혔다. 동시에 손가락 하나가 뒤를 뚫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불쾌한 이물감에 윤세는 도리질을 쳤다. 완이 다정하게, 달래듯 혀로 쓸어 주지 않았다면 윤세의 몸부림은 한층 더 심해졌을 거다. "쉬... 괜찮아... 아프게 하지 않아... 절대로 당신을 다치게 하지 않아..." 귓가에서 상냥하게 들려오는 수십 번의 속삭임. 애정을 가득 담아 다정하게 달래주는 수백 번의 키스... 굳어있던 몸에 힘이 빠지고 근육이 풀리자 뒤를 침입한 손가락은 조금 더 늘었다. "흐윽..." "좋아해, 이윤세... 좋아해..." 이윽고 완전히 발기한 완이 서서히 윤세의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윽..." 과도하게 벌려진 근육이 경련이라도 일으킬 듯 부들부들 떨려왔다. 완은 풀이 죽은 윤세의 것을 잡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하앗..." 윤세가 조금씩 힘을 뺄 때마다 완은 조금씩 조금씩 안으로 들어왔다. 그때마다 움찔 움찔 몸이 떨렸다. 참다 못한 윤세는 두 팔로 완의 목을 감고,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은 다음 끌어 당겼다. "흑-!" 투둑, 하고 찢어지는 느낌과 함께 완이 단숨에 안으로 들어왔다. 다급하게 숨을 들이마시고 동작을 멈추고 있던 완이 급하게 상체를 일으켰다. "괜찮아? 당신 찢어졌....!" 그러나 윤세는 그런 완을 더욱 끌어당겼다. "괜찮아. 그냥 해..." "윤세..." "어서..." "윽-" 엉덩이를 조금 들자 완은 다급히 숨을 멈추고 허리를 감아 당겼다. "미안... 더 이상 못 참겠어..." "하앗-!" 거센 피스톤 질이 시작되었다. 지친 듯이 잠든 완의 얼굴은 윤세는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거의 시야의 절반이 사라졌다. 꼭 눈가리개를 한 경주마 같다며 윤세는 고소를 지었다. 그래도... 아직은 보인다. 윤세는 손을 들어 완의 얼굴을 쓸었다. "으음..." 간지러운지 고개를 살짝 젓는다. 피식 웃던 윤세는 가만히 고개를 숙여 그의 벗은 어깨에 입술을 댔다. "윤세..." 낮은 웅얼거림이 새어 나온다. 요 며칠 간 계속 느껴왔던 저릿한 통증이 다시 심장을 울렸다. "제길..." 꾸욱 주먹을 쥐고 고개를 숙인 그의 아래로 시트가 조금씩 젖어 들었다. ** "으음..." 환한 햇빛에 뒤척이던 완은 눈을 떴다. 어제 자면서 블라인드를 치지 않았나 보다. 시간은 벌써 한낮이 되었는지 뜨거운 햇빛이 침대 위에까지 늘어져 있다. "아, 젠장..." 끙, 소리를 내며 일어나던 완은 비어 있는 옆자리를 보고 흠칫 굳었다. ".........선.........생........?"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 집안을 뒤졌다. "선생!" 윤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며칠 전에 그의 집에 들러 가져다 달라고 했던 그의 옷도, 그의 신발도... "제길, 이윤세!" 와장창,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집어 던졌다. 벽에 걸린 액자며 선반이 순식간에 TV들과 부딪혀서 쓰레기가 되었다. 디지털 벽시계마저 집어던지려고 뜯어내던 완의 손이 문득 멈췄다. 월, 일이 함께 나오는 디지털 시계에는 달이 바뀌어 있었다. 9월. 개학이다. "이 망할 선생이!" 개학이면 개학이라고 귀뜸이라도 좀 해 주던가! 후다닥 옷을 주워 입고 완은 집을 나섰다. 혼다 CBR 1100이 중후한 엔진음을 울리며 여운을 남겼다. 학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점심 시간이었다. 밥도 못 먹고 서둘러 나온 터라 출출함이 느껴졌다. 윤세를 잡아 같이 밥이나 먹을까, 생각하며 완은 곧바로 교무실로 향했다. "어머, 정완. 개학 첫날부터 지각이야, 넌?" ".............!" 완은 순간 멍한 얼굴로 책상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학교 왔다고 보고하려고 왔니? 못 본 사이에 착해졌네." "........이윤세 선생은?" "이선생이야 임직이었으니 그만 뒀지. 어차피 나 대신... ........완아?! 정완!!" 이제는 날씬해진 몸을 한 담임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완은 서둘러 뛰쳐나왔다. 심장이 불길한 음을 내며 뛰고 있었다. 철컥. 반지하인 윤세네 집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완은 거세게 문을 두드렸다. "윤세야! 이윤세!! 거기 있지! 문 열어!!" 오늘따라 급하게 나오느라 열쇠를 가지고 오지 않은 게 이렇게 후회될 수가 없었다. "이윤세!!!" "거기, 학생. 뭐야?" 계단 위에서 불쑥 들려온 말에 완은 고개를 들었다. 중년 남자 하나가 경계가 가득한 눈을 하고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집에 사는 이윤세 선생님 제자입니다. 선생님께 볼 일 있어서 왔습니다." "그 사람 오늘 아침 일찍 방 빼서 나갔는데? 거기 이제 빈 집이야." ".........뭐?!" 순식간에 뛰어올라 완은 남자의 멱살을 잡아챘다. "뭐라고?! 다시 한 번 말해봐!" "큭.. 이 사람... 왜 이래...?!" "이윤세가 어딜 갔다고?!" "아침 일찍 방 뺐..." "열쇠 하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데? 그래도 방이 빼 져?!" "무슨 소리야... 열쇠 두 개 다 받았는데..." ".........!" 남자를 팽개치고 완은 집으로 달렸다. 이윤세! 이윤세! 이윤세!! 이윤세!!! 머릿속이 폭발할 것 같았다. 벌컥 대문을 열고 완은 언제나 키를 던져 놓던 책상 위를 훑었다. 없었다. 아무것도. "씨발..." 책상 위의 물건을 다 쓸어 내렸다. 책상 서랍을 열고 안의 물건을 다 끄집어내었다. 혹시나, 혹시나... 미친 듯이 물건 사이를 뒤집고 쓰레기통을 엎었다. "이윤세...." 숨을 몰아 쉬며 완은 주저앉았다. 쓰레기통에서 굴러 나온 구겨진 종이가 발치에 떨어져 있었다. 별 생각 없이 종이를 주워 들던 완의 얼굴이 굳었다. '와'라고 쓰다만 글 위에 좍좍 줄이 그어져 있는 종이. ".....이게 뭐야..." 완은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이게 뭐냐고..... 이윤세!!!!!!!!!!!!!!" 울부짖는 듯한 완의 고함이 집안에 울려 퍼졌다. 어느새 짧아져 버린 해가 지면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며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여름은 끝났다. 10. 항상 그렇지만 막 비행기가 착륙한 공항은 특히나 더 시끄럽다. 공항 직원의 안내 멘트와 우루루 출구로 몰려드는 마중객들, 세관검사대에서 실랑이를 벌이는 사람들까지... 그 사이로 작은 슈트케이스 하나만을 가진 장신의 남자가 유유히 빠져 나왔다. 편안해 보이는 세미 정장에 선글라스로 가려진 얼굴로 유추해 보건데 나이는 이십대 중 후반, 목덜미를 약간 덮은 긴 머리카락이 자유분방해 보인다. 공항 로비에서 잠시 주위를 살펴보던 그는 단호한 걸음으로 공중전화로 향했다. 그리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접니다. .......네, 지금 도착했습니다. .................예, 제 마음은 변함 없습니다. ...........아닙니다, 말씀만 해 주시면 지금 바로..... 예? 고모님이요? ..........예, 알겠습니다. .............예. 집에서 뵙겠습니다. ......예.." 남자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입구로 나왔다. "......" 강한 햇살에, 선글라스를 꼈음에도 절로 미간이 접혔다. 잠시 인상을 쓰며 태양을 바라보고 있는데 클락션 소리가 울렸다. 소리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벤츠의 문이 열리며 우아한 옷차림의 중년 부인이 내려와 그를 끌어안았다. "완아-!" ".......고모님." 마냥 소녀 같으신 고모님을 완은 부드럽게 마주 안아 주었다. "우리 꼬맹이, 잘 다녀왔어?" "꼬맹이라뇨..." 나이가 몇 갠데... 하며 피식 웃는 완을 그녀는 소매를 잡고 차안으로 이끌었다. "그럼 이제부터 회사에서 일하는 거야?" ".....예, 그러기 위한 유학이었으니까요." "아아.. 성우가 마음이 든든하겠네... 우리 강현이는 일년 전에 대구로 내려갔어. 네 고모부가 그냥 어떤가 둘러보라고 내려보낸 거라 얼마 전에 다시 불러오려고 했더니 글쎄 이 녀석이 좀 더 있겠다지 뭐니. 대학 때부터 나가 살더니 이젠 어미가 보고 싶지도 않나 봐." "그럴리가요." "그나저나 너도 참 독하다. 어떻게 5년 동안 딱 연락을 끊을 수가 있니. 성우가 너 많이 걱정했어." ".....그러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하긴, 그랬으니 이렇게 빨리 올 수 있었지. 우린 다들 10년은 걸릴 거라 예상했었거든." "........" "그래, 5년 만에 고국에 돌아온 기분이 어때?" "글쎄요, 별로 달라지진 않은 것 같은데요." "하긴 요즘은 하도 서구화되어서 별 차이도 없다더라." "예." 공항을 빠져 나온 차는 어느 사이엔가 끝도 없이 높은 담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는 주택지도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사모님. 어서 와요, 완이 학생." "오랜만입니다, 아줌마." "이젠 훤한 대장부가 다 되었네. 회장님 연락 받고 2층에 방 치워놓았어." "감사합니다." "그럼 완아. 피곤할 텐데 올라가서 쉬렴. 성우 오면 부를 게." "예." 완은 2층으로 올라갔다. 예전에 살던 맨션의 짐을 고스란히 옮겨 놓았는지 하나도 변한 게 없다. 완은 가방을 침대 발치에 내려놓고 그대로 다이빙을 하듯 침대로 떨어졌다. 깨끗한 시트에서 향기로운 섬유 유연제 냄새가 났다. 잠시 팔을 벌리고 누워 있던 완은 몸을 비틀어 지갑을 꺼내 안쪽 깊은 곳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약간 노랗게 변색되어 세월의 흔적을 보여 주고 있는 종이는 반듯하게 두 번 접혀져 있었지만 예전에 구겨졌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조심스레 종이를 펼친 완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졌다. '와'라고 쓰다만 글자 위에 좍좍 그어진 두 줄. 하도 꺼내봐서 가장자리가 너덜거리고 접힌 부분이 헐기 시작하자 더 이상 열어 보지도 못했던 종이. 처음에는 이럴 거 차라리 쓰지 말지..라며 원망했던 마음이 시간이 흐를수록 변해갔다. 글을 쓴 게 연필이 아니라 유성 볼펜이라 다행이라고... 좍좍 찢어 버리지 않고 단지 구겨서 쓰레기통에 버린 게 다행이라고... 완은 희미하게 구겨진 자국이 남아 있는 종이에 코를 묻었다. 아니라는 건 알지만 왠지 이렇게 하고 있으면 그의 체취가 배여 나올 것 같다. ......아무리 미친 듯이 찾아보아도 그가 남긴 것은 이것 밖에 없었다. 그 사실이 어이없을 정도로 기가 막혀서, 종이에 코를 박은 완의 감은 눈이 조금 젖어 들었다. 이윤세... 이제 조금이야... 윤세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된 뒤 완은 학교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바이크를 몰고 미친 듯이 돌아다녔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윤세가 좋아하는 장소가 어딘지, 그의 친구가 누구인지, 완은 아무 것도 몰랐다. 민증도 없는 미성년자에게는 어떤 정보든 제약이 너무 많았다. 결국 윤세가 사라진지 2주만에 완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던 성운 그룹 본사를 제 발로 찾아갈 수 밖에 없었다. "접니다." "....오랜만이구나." 완과 많이 닮은 정회장은 무대포로 난입한 완에 의해 회의가 중단될 수 밖에 없었음에도 그다지 동요하지 않는 얼굴로 완을 바라보았다. "알고 계시죠?" "뭘?" "씨발, 시침 때지 말아요. 아닌 척 하면서도 결국 내 일은 다 당신 귀에 들어가는 거 알고 있어. 어디 있어요?" "누구 말이냐?" "썅. 이윤세! 우리 반 임시 담임!!" "네가 강간했던 그 사람 말이냐."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아요." 완은 고개를 떨구었다. 정회장은 여전히 굳은 눈매를 풀지 않았다. "어디 있어요?" "모른다." "회장님!" "제 발로 네 곁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이다. 네 주변의 인물에게까지 사람을 붙여 놓진 않아." "찾아 주세요. 찾을 수 있잖아요." 완은 간절히 애원했다. "내가 왜." "회장님!" "하나뿐인 아들이 사내자식과 붙어먹는 걸 보고도 잠자코 있어 준 거로 충분해. 등까지 떠밀어 줄 생각은 없다."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평생을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라구요." "...네 평생은 아직 많이 남아 있다. 그런 10살이나 연상의 동성에 장님이 아니더라도 네 평생을 걸 만한 사람은 또 있을 거다." "....뭐.....라.....구요.....?" 완은 쇠망치로 후두부를 내려치는 충격을 받았다. 뭔가.. 무슨 얘기를 들은 것 같은데... 듣긴 들었는데 머릿속에서 입력이 안 된다. 근데도 이렇게 거칠게 뛰는 심장의 정체는 뭐지? 강한 충격을 받은 것 같은 완을 보며 정회장은 미간을 접었다. "네 평생을 걸만한 사람은 또 있을 거라고." "그것 말구요!" 쾅, 하고 책상을 두들겼다. "버르장머리 없이 이게 무슨 짓이냐." 그러나 완의 귀엔 정회장의 목소리도 전혀 들리지 않았다. "장님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 사람이 왜 장님이야? 장님이 어떻게 애들을 가리켜요?!" "........무슨 유전병이라더군. 마지막으로 병원을 찾은 것이 9월 아침이었다. 의사 말로는 시신경이 완전히 죽어서 이식도 불가능하다고 했다. ......정말 몰랐냐." 비실비실 완은 뒤로 물러났다. 머리 속에서 그간의 윤세의 모습이 휙휙 지나갔다. 문을 열지 못해 10분 이상 낑낑거리던 윤세, 심하게 미간을 찌푸리며 절대 눈을 마주치지 않던 윤세, 날이 갈수록 침대나 소파에서 움직이지 않던 윤세... 몰랐다. 진짜 몰랐다. 완은 털썩 주저앉았다. 온 몸이 후들거렸다. 그 모습을 정회장은 눈을 찌푸린 채 지켜보고 있었다. 뚝, 하고 갑작스레 떨어진 젖은 습기가 바닥에 깔린 양탄자를 적셨다. "찾아.. 주세요..." "......." "찾아 주세요. 하라는 데로 다 하겠습니다. 뭐든지 시키는 데로 할게요. 윤세만... 그 사람만 옆에 있게 해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아버지." 그토록 싫어했던 아버지라는 소리까지 결국 내뱉는 완을 보는 정회장의 심정은 착잡했다. 그러나 줄곧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던 완은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결혼도 하지 못하는 두 사람이다. 무엇으로 평생을 함께 하겠다는 거냐." 차가운 목소리였지만 왠지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아 완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원하시는 데로 하겠습니다. 이렇게 해야 믿을 수 있다고 하시는 모든 일 해 보이겠습니다." ".....몇 가지 조건이 있다." "......" "유학 가라." ".........!!" 뭐든지 해 보이겠다는 의지를 담은 눈이 경악으로 커지고, 곧이어 맹렬하게 비난을 담기 시작한 것은 순식간이었다. "유학 가서 잊으라구요? 세월이 잊게 해 줄 거라고 말씀하실 겁니까?" "지시만 내리면 나는 일주일 내로 그 사람을 찾을 수 있다. 그래서 데려오면? 너는 그 사람을 책임질 수 있느냐?"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벙긋거리는 완을 정회장은 손을 들어 막았다. "너는 지금 미성년자고, 너에게 들어가는 돈은 다 내 돈이다. 미우나 고우나 너는 내 아들이지만 나는 그 사람까지 먹여 살릴 생각은 없다." "........." 완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유학 다녀와서 회사에 나와라. 시기가 늦어 강현이처럼 밑에서부터 시작할 수는 없는 게 안타깝다만 할 수 없지. 네가 번 돈으로 그 사람을 거두는 것에 대해서는 별 말 하지 않겠다. 대신 네가 유학 다녀 올 때까지는 음으로 그 사람을 지켜 주겠다." ".........." "유학 다녀와서 까지 너희들의 마음이 변함이 없다면 인정하겠다. 그러나 그 사람이 그동안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든지, 너에 대해 전혀 감정이 없다면 사내답게 물러나라." "......알... 겠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정회장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 "대를 이어라." "..........!!" "결혼을 하던 대리모를 두던 상관없다. 성운은 반드시 정가의 핏줄에 의해 이어져야 한다." ".........못합니다." "........." "못합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은 윤세입니다. 어떻게 그 사람을 두고..." "대리모라도 상관없다고 분명히 말했다." "그래서, 또 내 어머니 같은 사람을 만들라고?!!!!!" 완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정회장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가문과 핏줄이 중요합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있음에도 가문의 뜻에 따라 다른 여자와 결혼하고, 그 여자에게 후손이 없자 또 다른 여자를 취하고, 그래서 태어난 아이를 어미의 품에서 강제로 뺏을 정도로? 그래서 그 여자들이 모두 어찌 되었죠? 당신의 알량한 가문애 때문에 몇 사람이나 희생되었는지 자각이나 하고 계십니까? 사람 목숨이 그깟 가문 존속 보다 더 중요합니까?! 그런 식으로 존속되어야 하는 가문이라면 저는 이 길로 당장 나가 정관 수술을 받겠습니다!" "..........." 한참을 서로 노려보던 두 사람 중 결국 정회장이 눈을 돌렸다. "그 얘긴 네가 유학을 다녀와서 하도록 하자." "제 생각은 변함 없습니다." "널 유학 보내고 그 사람을 차라리 죽고 싶도록 만들 수도 있다." "윤세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가만 두지 않겠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완은 책상을 짚고 정회장을 노려보았다. "그러니 일단 얌전하게 유학 가거라." "이런 말까지 들었는데, 당신을 어떻게 믿고?" "너는 내 말을 믿을 수 밖에 없으니까. 여기서 네가 등을 돌려 나간다면 나는 모든 줄을 동원해 네가 그를 다시는 찾을 수 없도록 할 거다. 그러나 유학에서 돌아오면 너도 성인. 네 힘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충분한 힘을 가지게 되겠지. 설사 내가 그동안 그를 돌보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때까지도 그를 사랑하고 있다면 너는 충분히 그를 보살필 여유를 가지게 될 거다. 한국에 남아서 성인이 되어 그를 찾겠다는 말 따위는 하지 마라. 그럴 경우 나는 단 한푼의 원조도 하지 않을 거다. 너는 맨손으로 그를 찾아야 한다. 어쩌면 네가 유학 갔다 오는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할지도 모르지. 그래서 그를 찾는다 하더라도 너희들은 밑바닥에서 시작해야 한다. 하루 벌어먹고 살아야 하는 극박한 현실 속에, 너처럼 고생한 번 못해본 철부지가 과연 버틸 수 있을 것 같으냐? 그 속에서도 과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 힘줄이 튀어나오도록 움켜쥔 주먹과 꽈악 악물린 입술이 완의 마음을 대변해 주고 있었지만 그는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집으로 들어가 있거라." 정회장은 회전 의자를 빙글 돌려 더 이상의 대화를 거부했다. 결국 완은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2주 후, 완은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똑똑. 가벼운 노크 소리에 완은 몸을 일으켰다. 깜박 잠이 들었었는지 밖은 어느새 어두워져 있었다. "완아." "예, 고모님." 그녀는 서류 봉투 하나를 들고 미안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세요?" "성우가... 갑자기 일이 생겨서 오늘 못 들어온다지 뭐니. 윤기사 편으로 이것만 보내왔어. 네가 기다리는 거라던데?" ".............!" 퉁기듯이 일어나 완은 봉투를 받았다. "아, 고맙습니다. 고모님. 아버지야 언제든지 뵐 수 있는데요, 뭐. 오늘만 날인가요?" "그래. 서운해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럼 좀 있다 밥 먹으로 내려오렴." "예." 그녀를 내려보내고 완은 천천히 봉투를 열었다. 손이 조금 떨렸다. 봉투 속에는 지난 5년 간의 그가 담겨 있었다. 윤세.... 완은 소중하게, 소중하게, 서류들을 품에 끌어안았다. 11. 컹- 컹- 벌컥, 문이 열리고 커다란 덩치의 개가 신나게 뛰어 나왔다. 그 목줄이 아직도 길게 안으로 이어져 있었지만 개는 아랑곳하지 않고 밖에 나온 게 기쁜지 마냥 날뛰기만 했다. 결국 목줄을 잡고 있던 누군가가 개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딸려 나왔다. 가벼운 셔츠를 걸치고 색이 짙은 안경을 쓰고 있는 남자였다. 그 뒤를 이어 앞치마를 한 젊은 여자가 뛰쳐나왔다. "선생님! 그냥 가시면 위험하다니까요." "괜찮습니다. 뭐, 자주 다녔던 길이고, 이 녀석도 지금은 흥분해서 날뛰지만 좀 진정하면 누구보다 얌전하다는 거 잘 아시잖습니까." 혈기왕성한 개가 힘에 부쳐 쩔쩔 매면서도 남자는 웃으며 여자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럼 진짜 저기 놀이터만 돌고 오셔야 해요!" "예."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성인 남자보다 힘이 더 좋은 개를 다루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어이, 야, 야.. 좀 천천히 가자니까. 어이, 소망아!" 비틀비틀 거의 뛰다시피 개를 따라가던 남자는 결국 돌부리에 걸려 줄을 놓치고 말았다. "우왔-!" 아찔함에 눈을 질끈 감았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뜻밖에도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있었다. "..........??" 그가 얼결에 붙잡은 것은 고급으로 느껴지는 부드러운 양복 천. 그는 자신을 붙잡은 사람이 꽤 체구가 큰 남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 저... 고맙습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그를 붙들고 있는 사람은 그가 다시 넘어질 까봐 걱정이라도 하는 듯 어깨와 허리를 꼭 붙들고 있었다. "죄송합니다만, 도와주신 김에 하나만 더 부탁해도 될까요?" 그는 남자의 얼굴이 있으리라 짐작되는 곳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그의 몸을 잡고 있는 손아귀의 힘이 좀 더 강해졌다. "저희 소망이 좀 찾아 주시겠습니까? 제가 아까 데려온 갠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컹컹 소리가 들리더니 예의 그 개가 목줄을 질질 끌고 다시 돌아왔다. 그 짧은 사이에 갇혔던 스트레스를 어느 정도 발산했나 보다. 소망이는 그의 손바닥을 핥아 친근감을 표시하고는 옆의 존재에게 이를 드러내며 경계했다. "그려지마. 소망아. 도와주신 분이야. 너 때문에 넘어질 뻔 한 거 도와주신 분이라니까." 무릎을 꿇고 소망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몇 번이나 되풀이하자 개는 마치 말을 알아듣는 것 처럼 으르렁거림을 멈추었다. 그는 다시 일어나서 남자를 바라보았다. "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눈이 불편해서 하마터면 굉장히 곤란해 질 뻔했거든요." "........어디까지.. 가십니까?" "..................?? 잠시 요 앞 놀이터에 갑니다만..." 살짝 쉰 듯한 목소리가 왠지 묘하게 귀에 익어 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는 사이에 남자는 그의 손에서 목줄을 받아 들고 다른 손으로는 그의 허리를 감았다. ".....! 저기요?!" "갑시다.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놀란 그가 펄쩍 뛰었지만 남자는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놀이터에 그를 앉히고 소망이의 목줄을 풀어주고 그에게 찬 음료 하나를 안겨 주고서야 남자는 그의 옆에 앉았다. "대구 분 아니시죠?" "........." 말 없이 남자는 그가 들고 있던 캔을 따서 손에 쥐어 주었다. "억양이 서울 쪽인 듯 한데... 대구에는 사업차 오셨나 보지요?" "...........그.. 눈은.. 선천적입니까." 어쩌면 무례하다고도 할 수 있는 질문인데도 그는 의외로 사심 없는 미소를 지었다. "뭐.. 선천적이라면 선천적일 수도 있겠군요. 유전병이라고 들었습니다. 병명은 너무 어려워 못 외웠는데, 거의 100% 유전이라고 하더군요." 그는 음료를 한 모금 머금었다가 이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포카리 스웨트. 그가 좋아하는 거다. "처음엔 굉장히 좌절했었습니다. 저 고아거든요. 얼굴도 모르는 부모가 남겨준 게 고작 이런 유전병 하나라니... 허탈해 지더군요. 처음엔 주변 다 정리하고 죽어버릴까도 생각했는데 그러자니 너무 억울했습니다. 유전병 물려받은 것도 억울한데 내가 왜 죽어 주기까지 해야하나 싶더군요. 그래서 온 곳이 여깁니다. 여기서 점자 배워서 선생노릇 하고 있어요. 배운 게 이것 뿐이라 결국 이걸로 밥 벌어먹어야 할 것 같아요." 하하, 웃으며 그는 다시 음료를 삼켰다. "저 원래 이렇게 아무에게나 말 막하는 사람 아닌데... 그 쪽 분 목소리가 왠지 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누군가랑 닮아서 마음이 풀렸나 봅니다." ".........누군지.. 여쭤 봐도 되나요?" 몇 번이나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는 남자의 기색을 읽으며 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여름 감기라도 걸렸나? "그냥... 시력을 완전히 잃기 전에 마지막으로 만났던 사람입니다. 아, 목소리가 굉장히 좋았어요. 당신처럼. 처음 만났을 때가 한창 시력이 나빠져 눈은 눈대로, 귀는 귀대로 안 들려서 고생하던 때였는데... 묘하게 그 녀석 목소리만 뚜렷하게 들렸어요. 그래서 기억을 금방 하게 되었습니다. 굉장히 허기져 보이는 아이였는데..." 그는 아련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때는 그 녀석을 챙겨줄 마음의 여유가 나도 없었습니다. 망가져 가는 눈으로 멀쩡한 흉내를 내는 게 너무 힘들었거든요. 그래서 그녀석이 그렇게 절박하게 잡는 거 외면했습니다. 아니, 실은 도망쳤다고 해야겠지요. .........무서웠거든요. 내 몸이 이 모양이니... 한결같이 올곧은 눈으로 매달리는 녀석의 시선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 녀석은 뭔가 기댈 곳을 찾고 있는데... 나는 뿌리깊은 나무가 아니거든요. 튼튼한 거목인 줄 알고 기대었는데... 그게 썩은 고목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그 뒤를 상상하는 게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그 녀석을 버렸어요. 버림받지 않기 위해서..." "그럼..." 남자는 다시 헛기침을 하여 목을 가다듬었다. "지금 다시 만난다면 그를 받아 주실 수 있습니까?" "......글쎄요..." 그는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이미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녀석은 이제 더 이상 버팀목이 필요 없을 거에요." "제 얼굴... 한 번 만져 보시겠습니까?" "예?" 그는 놀란 얼굴로 남자를 돌아보았다. "그.. 맹인들은 손으로 얼굴을 만져서 사람을 기억한다고 들었는데... 아닙니까?" "그렇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친하지도 않는 사람의 얼굴을 만진다는 것은 두 사람 모두에게 실례가 아닌가. 그렇게 망설이는 그의 손을 남자는 덥썩 잡아 자신의 얼굴에 대었다. 놀라서 빼려는 손은 크고 단단한 손에 갇혀 빠지지 않았다. "그냥, 만져 보세요. 닳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 잠시 망설이던 그의 나머지 손이 천천히 남자의 얼굴에 닿았다. 날이 더운 관계로 생리적으로 맺혀 있는 이마의 땀방울을 가볍게 훔쳐준 그의 손은 천천히 조심스럽게 남자의 얼굴을 여행했다. 짙은 눈썹과 오똑한 콧날, 도톰하고 부드러운 입술을 매만지던 그의 손이 왠지 바르르 떨렸다. "저.. 죄송합니다. 저는 이만..." 불에 데인 듯 손을 떼고 황급히 일어나는 그의 손목을 남자는 움켜쥐었다. "또... 도망가는 거야....?" 더 이상 잠긴 목소리를 내지도, 기침을 하지도 기침을 하지도 않는 남자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나... 난...." 손목을 잡힌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나... 기억 못해? 나는 당신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는데.... 이윤세." 털썩, 윤세의 몸이 무너졌다. "당신 말대로 나는 이제 버팀목 같은 거 필요 없어. 철없는 투정을 받아 줄 상대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심술 부릴 상대가 필요한 것도 아니야. 굳이 아버지 회사에 낙하산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얼마든지 먹고 살 수 있는 능력도 있어. 그러니... 이제 나는 매달릴 상대 같은 거 필요 없어." 남자, 완이 잡고 있던 손목을 놓자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윤세는 넋이 빠진 얼굴로 망연히 바닥으로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저 멀리 미끄럼틀 아래의 모래를 무지막지한 기세로 파헤치던 소망이가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고 이쪽을 쳐다보았으나 주인이 인정한 사내 외엔 어떤 위협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다시 작업(?)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완은 한쪽 무릎을 꿇고 윤세의 옆에 앉았다. 그런 완을 아는지 모르는지 윤세는 미동도 않고 바닥에 앉아 있었다. 완은 손을 뻗어 윤세의 볼을 감싸 안고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그래도 당신을 필요로 하면 안 돼?" "........!" 작살 맞은 고기처럼 윤세가 움찔했다. 경악으로 살짝 벌어진 입술에 완은 자신도 모르게 살짝 입술을 부볐다. 펄쩍 뛰어 뒤로 물러나는 윤세를, 어깨를 잡아끌어 당겼다. "나는 버팀목이 필요한 게 아니야. 그냥 당신이 필요할 뿐이야. 괴롭게 해서 미안해. 부담스럽게 해서 미안해. 이제는 내가 당신의 버팀목이 되어 줄게. 당신의 그늘이 될게. 그냥... 그냥 내 곁에 있어주면 안 돼? 싫어하는 짓은 하지 않을 게. 원한다면 보기만 할게. 밀어내지만 말아 줘.... 당신이 없는 5년 간은....... 정말 내겐 지옥이었어........." 설득의 목적으로 시작된 말은 애원이 되고 눈물이 되었다. 완은 윤세를 꽈악 끌어안고 부들부들 떨었다. 망연하게 안겨 있던 윤세가 팔을 들어 그를 밀어내려고 하자 완은 오히려 필사적으로 으스러져라 그에게 매달렸다. "나 싫어하지 않잖아. 내가 당신에게 몹쓸 짓을 많이 했다는 건 알고 있어. 그래도 당신이 날 미워하지 않는다는 눈치 정도는 있어. 사랑해... 사랑한단 말이야... 나도 어쩔 수가 없어..." 물기가 묻어나는 젖은 목소리에 윤세는 머뭇머뭇 손을 들어 그의 뒤통수와 등을 쓰다듬었다. 부드럽게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몸을 살짝 밀어내자 의외로 완은 순순히 그를 풀어 주었다. "난... 변하지 않을 거다." "...........응."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던 완은 윤세가 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자 얼른 대답했다. "난 여기서 내 일을 계속할 거야." "응." "그렇다고 네가 모든 일을 팽개치고 여기에 눌러 앉는 건 싫어." "..............................으응." (제길, 하고 완은 잠시 생각했다.) "좋은 상대가 나타나면... 결혼해." "싫어!" 생각보다 격한 반응에 윤세는 제자리에서 튀어 오를 정도로 놀랐다. 완은 인상을 잔뜩 쓰며 윤세를 노려보았다. "난 당신 밖에 없어! 내가 뭣 땜에 말도 안 통하는 곳에서 죽을 고생을 하며 공부를 마쳤는데!" "..........그러니까, 좋은 상대가 나타나면, 이라고 했잖아. 누가 좋아하지도 않은 사람이랑 결혼하라든?" "...아, 그래?" 그럼 안 해도 되겠군, 하고 완은 기뻐했다. "그럼... 이제 옆에 있어도 돼?" 조심스레 고개를 숙여 윤세를 살피자 작고 하얀 얼굴이 살짝 고개를 끄덕인다. 헤벌쭉 벌어지는 입을 수습도 못하고 완은 턱을 잡아 윤세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얼굴 좀 보자, 이윤세." "아, 그건...!!" 윤세가 말리기도 전에 완은 그의 안경을 훌러덩 벗겨 버렸다. 윤세는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눈 좀 떠 봐." "싫어." "윤세야..." "싫어. 장난치지 말고 안경 내놔." 정색을 하고 화를 내는 윤세의 반응에 완은 한숨을 쉬며 윤세의 두 손을 잡아 그의 볼에 대었다. "내 얼굴 여기 있거든? 그러니까 그대로 눈만 뜨면 돼. 응?" ".........보기 흉할 거야." "절대로 안 그래." "............초점 안 맞아." "눈 만 뜨면 내 얼굴이기 때문에 다른 곳은 보이지도 않는다니까." ".........." "윤세야..." 나직하게 몇 번이고 속삭이자 바르르 떨리던 눈꺼풀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드러난, 주위의 빛을 빨아들이는 것 같은 짙은 검정의 눈동자. 홀린 듯 눈동자를 바라보던 완은 이윽고 소중한 듯 두 눈에 키스를 하고 윤세의 귓가에 작게 뭐라고 속삭였다. 윤세는 피식 웃으며 완의 머리를 가볍게 툭 쳤다. 완은 환하게 미소지으며 그를 꼬옥 끌어안았다. 「나는 당신의 이 눈동자에 반했다니까.」 자주 왔다 갔다 하면 비행기 값이 많이 들겠다는 사소한 문제부터, 대를 잇길 종용하는 아버지라던가, 좋아한다는 말을 하기는커녕 상대가 있으면 결혼하라고 등 떠미는 윤세의 태도 등등, 산재한 문제는 아직 많이 깔려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주저앉아 있는, 열을 받아 뜨끈뜨끈한 놀이터의 모래가 비단 방석으로 느껴질 정도로 지금의 완은 행복에 가득 차 있었다. 여름은 이제 시작인 것이다. 完